- ‘스타크래프트’ 같은 리얼타임시뮬레이션 장르가 자리 잡기 전까진 다수의 유닛을 다루는 게임은 대개 턴제 방식이었다. 장기나 체스처럼 내가 한 번 공격을 하면AI가 나를 공격하는 방식이었는데, 마우스가 없었던 시절엔 많은 유닛을 컨트롤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전투를 그렇게 하냐 할 수 있겠지만, 장기에 익숙했던 세대이기도 했고 전자기기에 도입된 고전 오락의 방식이 게임적 허용처럼 느껴져 신선하기도 했었다. 영걸전과, 용의 기사, 창세기전을 하며 수많은 낮과 밤을 보냈다. 마우스가 보급된 후에도 이 같은 형식의 게임은 하나의 장르가 되어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었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의 출시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쉴 틈 없이 유닛을 움직여야 하고, 손의 빠르기가 곧 실력으로 치환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게임에 적응된 사람들은 점점 다른 이의 턴을 기다려줄 인내심을 잃어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샌가부터 이런 장르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옛 추억이 떠올라 요즘 출시하는 턴제 RPG 게임에 손을 대 보지만, 이내 그만두고 만다. 리얼타임으로 흘러가는 세계에서 상대의 턴은 나에겐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 나의 인생은 오로지 나의 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진. 모든 선택과 판단의 중심이 나에서 다른 이로 바뀌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 아이와 갈 수 있는 곳, 아이와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회사에 있지 않은 모든 시간들은 아이 위주로 흘러갔다. 나의 턴이 끝났고, 아이의 턴이 시작된 것이다. 앞으로 몇 년 간은 아이의 턴이되겠지.
턴제 RPG 게임처럼 이 시간은 수비의 시간이고, 인내의 시간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의 지난 턴을 반추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가 지금 나의 턴을 가져다 쓰는 것처럼, 나 역시 부모님의 턴을 가져다 쓰면서 자라왔다.
몇 년이 흐르면 다시 나의 턴이 돌아오겠지. 그때 우리의 시간은 다시 리얼타임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전까진 있는 힘껏 아이의 턴을 응원해주려 한다. 자. 이제 당신의 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