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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Oct 27. 2022

비상선언(2022) #8/12

마지막 수단마저 빼앗긴 사람들

√ 내용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은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네이버영화


10. 마지막 수단마저 빼앗긴 사람들


국가를 떠나 인류, 생명의 관점에서 보자.

내 생명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생명도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생명권을 비롯해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사실 이건 너무 당연한 인류 보편적인 이야기다.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피해나 손해가 발생할 것 같으면 삼삼오오 모여 머리에 띠를 두른다. 원래 이 방식은 힘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집단 이기주의를 달성하려는 방식으로도 쓰인다.

정말 생존에 위협이 가해져 목숨을 걸고 나서는 사람들, 억울함을 알리고 개선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시위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정말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 댓가로 돌아오는 것은 더 나은 내일이 아니라 숨통을 옥죄는 천문학적 금액이 적힌 손해배상 청구서였다.


그런가 하면, 연봉이 1억이 넘는 사람들도 노조를 결성해 임금인상을 외치며 파업과 시위를 한다.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 빨갱이를 외치며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까지 흔들며 시위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위 현장만 보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다.

좋은 정책을 펴서 국민의 공감을 얻어 판단 받아야 할 정치판에서도 자신들의 억지 주장을 피력하는 방법으로 피켓을 들고 국회에 앉아 시위한다.


국민들은 헷갈린다. 시위가 힘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수단인 줄 알았는데 집단의 이기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로 퇴색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말 마지막 수단으로 시위를 선택한 사람들의 행동은, 그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한데 딸려 들어가는 형국이 된다.

그들은 이제 무엇으로 자신들의 강직함과 절실함을 보여야 할까? 같은 형태로는 진심이 전해지지 않고 곡해될 것이 뻔하잖은가!


사람들은 지겹다. 예전에도 지겨웠고 앞으로는 더 지겨워진다.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서, 빈부격차에 따라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해지는 모든 것을 뭉뚱그려 보게 되면서 진실도 의미도 모두 사그라지고 마는 것이다.

더 문제는 그 와중에도 권력자와 기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허용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은연중에 확장되고 절박한 사람들은 더욱 사회의 구석으로 내몰리고 외면당하고 있다.


(#9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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