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지막 네오 Nov 05. 2022

비통한 분노를 담아

일상으로의 회귀 - 정치·사회편

정말 슬픈 일이다. 비통한 일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무슨 표현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또 하나의 아픔이 마음 깊이 아로새겨지고 말았다.

뜨겁게 피를 토해대는 심장을 움켜쥐고 주저앉아 마음껏 이 슬픔을 애도하고 싶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충분히 슬퍼할 겨를이 없다. 다음 톱니가 이미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톱니 사이에 끼어 죽지 않으려거든 눈물이나 흘리며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되겠다 싶다. 이러다가는 비통해할 영혼조차 남지 않게 될까 하는 근심에 빠지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다.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어야 하는가? 이제는 애초에 그런 날이 있었나 싶다.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지난날의 지루했던 시간마저 왜 그렇게 빨리 지나갔던가 싶은 어느 날의 깨우침. 수많은 생명의 빈자리가 덩그러니 공간 속을 쓸쓸하게 자리하고서야 비로소 느끼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깨침이다.

한겨울에 찬물 세례를 얹어 맞은 듯 온 정신이 번득 깨버렸다. 눈을 뜨고 마주한 나 자신의 몰골에 저절로 표정이 굳어간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어둠만 가득한 도시. 냉랭한 공기가 가스 퍼져나가듯 은밀하게 퍼져간다. 도시는 그야말로 차갑고 음습하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죽은 자들의 도시 같다. 당장 유령이 걸어 나와 소리 없이 눈앞을 지나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새벽이다.


그렇게 오늘도 잠은 일찌감치 떠났다.

도시에 엉겨 붙어 있는 정체 모를 하얀 안개처럼, 찬 공기는 호흡기까지 바싹 말라 붙이며 구석구석 어느 곳이라도 침투했다. 마른기침을 해대며 돌아누워봤자 이미 명료해진 의식은 혼잡한 세계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너무 강한 타격이 의식하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 가해지면 때론 아픈지도 모른 채 지나간다. 어느 날 어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알게 되었을 때, 그땐 너무 늦어버린 후다.

후벼 파여 눈에 드러난 상처만이 고통스러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크고 무서운 것이지만 누구도 세세하게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한다.

제아무리 허허롭게 떠가는 구름처럼 살고 싶은 사람일지라도 맨홀에 쓸려 내려가는 물줄기에 떠 있던 작은 먼지처럼 휩쓸려 들어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두운 배관을 지나도록 떠밀려 있는 오늘이다.


단지 짧은 표현으로 일깨울 수 없는 극단적인 고통은 어떻게 우리 앞에 왔는가?

삶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자신의 길을 걷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왜 충분히 아파하고 슬퍼할 겨를조차 없이 다시 긴장해야만 하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언제까지…


주먹을 힘껏 쥐어본다. 이렇게 맨손으로 쥔 주먹으로 저 거대한 톱니를 깨부술 수 있을까? 피가 터져 나오고 뼈가 으스러지겠지. 아니 그보다 더한 고통이 따라올지도 모른다.

이제 단순하게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은 원하는 작은 소망조차 아니다. 그 이전 단계의 원초적인 삶에 대해 느끼는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가슴으로, 또다시 거대한 어둠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느낀 것이다.


또다시 피가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온몸이 불타거나 거친 물대포 줄기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주먹을 불끈 쥐고 끊임없이 일어설 수밖에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죽은 것과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살아있음에 의미가 있고, 삶이 가능할 수 있다. 누구의 삶이든 똑같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삶이 없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선량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마치 TV 드라마 시리즈 보듯이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 제대로 된 삶이라 할 수 있나? 그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로 우리의 이웃이었고 가족이었으며 활짝 웃어주는 딸이었고 아들들이었다.


사과 백 번 한들 그들이 돌아오는가? 세월호 희생자의 가족들처럼 죽는 날까지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지독한 고통에 대해 누군가 책임지거나 반성이 있었던가? 마찬가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에게도 참된 위로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지금도 보이지 않는 한편에서는 거대한 다음 톱니를 돌리기에 바쁘다. ‘감추고 속이고 숨기기’에 맞춰진 톱니가 이미 돌고 있다. 곧 이 톱니에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던져 넣을 것이다. 그리고는 또 그다음 준비된 톱니가 대기하고 있다. 이 고통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사실 복잡하고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다. 너무나도 뻔한 것들을 우린 이미 다 느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진실한, 있는 그대로를 말하면 된다. 원인과 이유부터 거짓과 조작, 강압과 폭력, 오만과 독선, 무책임과 무능, 조롱과 모욕까지 모두 다. 이제 그런 것들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


핏발 선 눈을 애처롭게 들여다보기만 하며, 언제까지 반복되는 희생에 슬퍼하기만 해야 하나?

분명하게! 또렷하게! 이제는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끝.



매거진의 이전글 이태원 참사를 접하고 #5/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