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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Jan 05. 2023

거인의 죽음이 말하는 것

거인의 죽음 - 러브, 데스 + 로봇 시즌2(2021)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러브, 데스 + 로봇(Love, Death + Robot) 시즌2 중에서
거인의 죽음(The Drowned Giant)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니메이션 | 8부작 옴니버스
☞ 오픈 : 2021년 5월
☞ 등급 : 청소년관람불가
☞ 작품 관련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스티븐은 제보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해변에 도착한다.

해변에는 거대한 거인의 시신이 누워있다. 거인의 모습은 과학자인 스티븐의 눈에도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거인의 시신이 바닷가에서 치워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질 무렵까지 스티븐은 거인의 흔적을 찾는다.




제임스가 경외심을 갖고 바라본 거인은, 육체의 거대함에서 느껴지는 바와 달리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고대 신화 속 영웅을 떠올리게 하였고, 신의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제임스가 거인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절대적인 현실임을 자각하는 장면은, 꿈이나 판타지 혹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잊혀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회고라고 생각된다.


구경하려 몰려든 사람들은 처음에는 거대함에 압도되어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그러다 누군가 거인의 가슴에 올라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몰려든다.


산골짜기 맑은 옹달샘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구정물로 변하듯이, 대중에 의해 호기심과 오락적인 요소로 소비되고, 훼손되기 시작하는 거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제임스의 안타까운 눈빛에서 그려지는 것은 ‘슬픔’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장엄하고 신비로운 세계가 파괴되는 것을 오랜 역사적 흐름 안에서 지켜봐 온 늙은 철학자의 눈빛이었다.


이렇게 잊혀가는 옛것을 회고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이 작품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러브, 데스+로봇> 시즌1의 에피소드 <굿 헌팅>보다 더 정서적으로,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판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 또는 <어린 왕자>에서 <피터 팬>에 이르기까지. 우리 기억에 각인되며 강하게 남긴 것은 무엇이던가? 말 그대로 연기처럼 스러지는 ‘꿈과 환상’ 그대로였나?

어떻게 중년이 넘은 지금도 기억을 따라가면 그날의 소년 모습으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걸까?


현대의 더욱 놀라운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OTT 작품들의 범람에도 결코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란, 도대체 어떻게, 무엇이 다른 것일까?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가니 옛것이 좋은 줄 알았고, 일종의 향수(鄕愁)처럼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막연하게 느끼는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운 감정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에 들어선 인간 정신활동의 최종적인 흔적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작품으로써의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나 시대적 변화와는 상관없이 인간 본연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순수함’ 때문이다. 창작자의 순수함과 독자가 느낀 순수함이 꼭 같은 것이 아니라 해도, 분명 ‘순수’하게 마음에 담은 무엇이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경쟁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품이 아니라, 순수하게 인간 내면에 북소리를 울려주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거인의 시신 위에서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비록 생명이 끊어진 채 해변에 누워있지만, 당장이라도 거대한 거동으로 일어서 두 발로 쿵쿵 대지를 진동할 것만 같은 생생함을 상상한다.


제임스는 거인의 몸에서 놀고 있는 인간들을 ‘작은 복제품’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거인의 아름답고 완벽함을 ‘신(神)’과 같은 ‘순수한 완벽함’으로 본 것이다.

오직 인간 정신세계 안에서만 존재하고 그려질 수 있는 완벽함이란 사실은 현실에 실재하지는 않는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관념적으로만 가질 수 있는 실제(實際)이며, 인류의 오랜 역사 안에서 변화하기도 했다.


그런 변천을 겪으며 옹달샘이 오염되듯, 공장 굴뚝에서 품어져 나온 연기가 숲으로 번져가듯, <거인의 죽음>은 곧 ‘신의 죽음’이요, ‘예술의 죽음’이자 곧 ‘인간 순수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한 개인의 정신적 죽음은 공동체·사회·국가를 통해 대중의 정신적 죽음으로, 인류의 정신적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인간의 정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제임스는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 이기적이며 욕심 많은 인간, 세상 모든 오염물을 생산해 내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보다 해변에 시신으로 누워있는 거인에게서 더욱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견한다.


<거인의 죽음> 후반부에서 거인의 육체를 마음껏 훼손하고 모욕한 사람들은 다시 그 희귀성을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만들며, 신비로움이나 희귀성 자체에 대한 욕구마저 상업화함으로써, 스스로 생명의 순수성이나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짓을 일삼는 모습을 보여준다.


21세기의 새로운 해, 2023년이 밝았다.

어린 시절 SF영화나 로봇이 나오는 만화책에서나 보던 연도다.

그러나 그 시절에 꿈꾸던 기대치나 희망은 고사하고, 어둡고 암담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오늘이다.

먼 훗날, 현실을 살아간 우리들도 해변의 거인과 같이 취급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해도, 정녕 아무런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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