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사람마다 생각에 차이가 있듯이 공부하는 능력이나 이해하는 능력에도 차이가 있음은 왜 인정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걸 굳이 시험을 통해 구분하고 골라내는 게 합리적이고 공평하다고 말하니, 그럼 1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공정한 세상은 없는 것이 합당한 것이란 말인가?
순위를 매기지 않고도 충분히 함께 공생하는 사회여야 한다. 꼭 공부가 아니라도 저마다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때 국가나 사회가 전체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던가!
현재 우리나라 의료계를 보라. 선호하는 분과와 그렇지 않은 분과의 의사 수 차이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 저변에도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이해타산이 깔려있다.
사람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닌데, 이런 인프라로 구축되어야 할 기본적인 직업군에도 쏠림 현상이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돈이 되는 쪽으로 몰리는 사람들을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성공과 부가 보장되는 직업만 선호하게 된다면 도로 청소는 누가 하며, 아파트 경비는 누가 설 것이며, 전동차는 누가 운전하고, 배달은 누가 한다는 말인가?
또한 ‘최고의 공평’이란 말은 또 뭔가? 공평함에도 레벨이 있던가? 공평과 공정의 의미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은 ‘사람’을 평가하고 골라내기 위함이 아니다. 그 사람이 공부한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점검 차원이어야 한다. 미처 부족해 틀린 문제는 차후 공부하여 보강하면 그만이다. 시험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지 학생 자체의 쓸모를 평가하기 위한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교통경찰이 교통법을 위반한 운전자를 잡아넣기 위해 단속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교통경찰이 단속하는 이유는 사고를 줄이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지 운전자를 범죄자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공부나 시험 또는 성적을 토대로 어떤 한 인격 자체가 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차별이나 부당함을 겪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졸자든 대졸자든 학력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합당한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 게임이 좋으면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도 좋고, 춤과 노래가 좋다면 열정적으로 춤추고 노래하면 된다. 또 여성이기 때문에, 나이가 많기 때문에,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 등으로 차별받는 것 또한 빨리 사라져야 할 병폐다.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은 ‘직업과 공부’라는 챕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러분은 어떤 직업을 갖고 싶나요? 어떤 종류의 일을 하고 싶나요? 변호사, 판사, 과학자, 의사, 교수나 교사, 회계사, 세무사 등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요? 사실 인생에는 중요한 결정들이 아주 많은데, 그중 으뜸은 결혼이고 그다음이 직업입니다. 어떤 일로 밥을 먹느냐만큼 중요한 결정은 많지 않습니다.”
‘직업과 공부’ 챕터의 첫머리 부분이다. ‘좋은 직업’이란 ‘돈벌이가 좋은 직업’이 좋은 직업인가? ‘좋다’는 의미를 너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신지.
예로 나열된 직업들은 포괄적 의미에서의 직업이라기보다 소위 상위 1%라 불리는 ‘좋은 직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나, ‘좋은 직업’이란 무조건 ‘돈벌이가 좋은 직업’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 결혼이고 그다음이 직업이라는 말도 동의하기 어렵다. ‘으뜸’까지 붙여가며 확신에 차서,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람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그것을 ‘결혼’과 ‘장래 직업’으로 고정하여 유도하는 것은 다양성을 무시하고 고정관념의 틀 안에 가두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바로 앞 챕터 ‘안다는 것의 다섯 가지 단계’의 첫머리에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는 건 별로 없는데 확신으로 넘치는 사람입니다. 사실 확신으로 넘치는 이유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알량한 지식을 세상 지식의 전부로 착각해 확신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간다. ‘귀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다. 따라서 공부의 목적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것이라는 아래의 문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내가 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이유 중 넘버원은 바로 직업입니다. 많은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공부는 수단입니다.”
사람은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위의 글은 마치 사람은 원만한 일 처리를 위해 거기에 최적화된 기능을 가진 도구로 준비되어야 하며, 공부는 그 도구로 거듭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공부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말은 맞지만,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에 그쳐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을 하든, 더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헛공부다. 자신의 능력치를 계발하는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직업은 일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관계된 사람들과의 관계, 소통, 성취와 보람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