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봄여름가을겨울’
<기억을 위한 사진들>에 이어지는 곡, <노래여 퍼져라>는 이전 앨범에서 김현식의 <봄여름가을겨울>과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수록했듯이, 1세대 펑크밴드 [사랑과 평화]의 곡을 편곡해서 부른 것이다. 따라서 ‘김선욱 작사/김명곤 작곡/김종진 편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노래여 퍼져라>는 1978년 10월 15일 발매된 [사랑과 평화] 1집 [한동안 뜸했었지]의 2번째 트랙 곡이다.
[사랑과 평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펑크 밴드로, 초창기에는 기타 겸 보컬 최이철, 키보드 겸 보컬 김명곤, 키보드 이근수, 베이스 이남이, 드럼 김태홍으로 구성된 밴드다. 이후에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을 맡고 있는 이철호가 합류해서 활동했다.
대표곡으로 1집에서 <한동안 뜸했었지>, 2집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 3집 <울고 싶어라>, 4집 <샴푸의 요정> 등 대중적으로 성공한 곡도 많다.
[사랑과 평화]는 4집 앨범부터 펑크에서 재즈락으로 장르 변화를 시도한다. 이때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했던 장기호와 박성식을 영입하는데, [사랑과 평화] 4집의 대표곡인 <샴푸의 요정>은 장기호가 작사, 작곡한 곡이다. 이후 장기호와 박성식이 [사랑과 평화]를 탈퇴하여 [빛과 소금]으로 독립하고 [빛과 소금] 1집에 다시 수록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샴푸의 요정>은 바로 이 버전이다.
어쨌든, 이렇게 [봄여름가을겨울]은 [사랑과 평화]와도 연관성이 있다. 김종진은 장기호와 박성식이 합류했던 앨범인 [사랑과 평화] 4집에서가 아니라 1집 앨범에서 <노래여 퍼져라>를 선택하고 편곡해 [봄여름가을겨울] 4집 앨범에 수록했다.
앞서 말했듯이 [봄여름가을겨울] 4집 앨범은 3집처럼 앨범 전체를 미국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으며, 새로운 음악적 접목을 시도했다. 3집 앨범은 1집과 2집에서 느낄 수 없던 도시적이면서 세련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반면, 4집은 기존의 김종진 스타일의 감성에 더해 재즈에서 펑키 스타일이 더 많이 더해졌고 블루스풍의 브라스가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새로운 장르와의 퓨전 시도도 눈에 띈다.
연주곡 <이성의 동물, 감정의 동물>이 그 대표적인 곡인데, 퓨전 음악답게 음악 한 곡에서 여러 가지 음악 장르가 섞여 있는 것처럼 들린다. 쿵작거리는 기본 음률은 레게다. 레게 장르에 재즈 연주를 퓨전 했다.
뭐, 음악 무식쟁이가 장르가 어쩌고 저쩌고 떠드는 것은 부족한 음악 지식을 스스로 드러내는 짓이니 넘어가고, 이어지는 <영원에 대하여>와 <그대를 위하여>는 김종진이 마음먹고 써낸 김종진 스타일의 대서사시 같은 곡들이다.
아마 [봄여름가을겨울]을 좋아하는 팬들은 두 곡을 무척 좋아할 테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조금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다. <영원에 대하여>가 4분 20초, <그대를 위하여>는 무려 7분 50초나 된다. 4집 앨범 전체에서 가장 길다. 게다가 이 두 곡은 연속해서 이어진다.
길이도 길이지만 두 곡 모두 템포가 느린 곡이고,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노랫말이 문학적이다. 그런데 제목에서 풍기는 것과는 달리 <영원에 대하여>는 종교적 색깔이 없는 반면 <그대를 위하여>는 종교적 색깔이 짙다. <영원에 대하여>의 ‘영원’은 영원한 사랑의 ‘영원’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대를 위하여>는 사랑의 대상을 ‘영혼’으로 부르며, 그 영혼을 위하여 ‘영원’한 사랑을 기도하리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마음 가득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나약한 인간은 결국에는 종교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모양이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감정, 그것이 다른 사람과의 교류로 발생하는 ‘사랑’이라면 더욱 애절할 것이므로 소망하는 바가 남다를 거라 생각된다.
그런 애절함을 ‘소망’과 ‘기도’와 같은 문구로 다 표현할 수 있었을까? 아마 김종진도 역시 글보다는 음악이 훨씬 더 많은 느낌을 줄 수 있음을 헤아렸는지 모른다. 가사로 다하지 못한 부분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실 7분 50초도 부족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이런 칙칙해진 분위기를 뒤바꾸려 했던 것인지 이어지는 연주곡 <페르시아 왕자>나 <디밥>은 경쾌하고 빠른 곡이다. 게다가 4집 앨범에서 시도된 음악적 장르 변화의 시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곡들이기도 하다.
연주곡인 <페르시아 왕자>와 가사가 있는 <디밥>은 발표된 CD에는 들어 있지만 LP에는 누락되었다.
<페르시아 왕자>는 제목의 역할이 아주 큰 연주곡이다. 제목을 모른 채 연주를 들었다면 <페르시아 왕자> 같은 제목은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연주 도입부나 중간중간 살짝 풍기는 아라비아풍 람바다 멜로디가 있지만 제목을 모르는 채로 상상력을 발휘해 듣는다면 스파이 영화의 장면들이 더 어울리는 그런 곡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 곡을 들으면 007 같은 스파이가 긴박하게 달리는 추격 장면이 떠오른다. 이어 스파이가 아름다운 여성을 유혹하는 장면, 악당들과 치고 박는 장면,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장면 등이 한 곡의 연주에서 줄이어 연상된다. 흠…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걸까?
<디 밥>은 4집 앨범에서 펑키가 가미된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그동안 [봄여름가을겨울]이 해왔던 음악과 사뭇 다르다.
그리고 이어받는 연주곡 <전도서>는 다시 <그대를 위하여>에서 이어지는 종교적인 분위기에 엄숙함마저 얹혔다. <전도서>는 김종진이 작곡한 연주곡이 아니다.
이 음악의 작곡은 그 유명한 미국의 맹인 가수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다. 스티비 원더의 1979년 앨범인 「Stevie Wonder’s Journey Through “The Secret Life of Plants”」에 수록된 <Ecclesiastes>가 원곡이다. 그의 노래 <Part Time Lover>나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곡인 <Superstition> 같은 곡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스티비 원더의 음악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되는대로 스티비 원더의 앨범도 찾아서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국내 최초의 라이브 앨범인 [봄여름가을겨울]의 1991년 Live 앨범에서 그들의 시작 곡인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에 이어 스티비 원더의 <Superstition>이 두 번째 곡으로 연주된다.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신선한 리듬에 흠뻑 빠져 LP가 튈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귀가 즐겁고 싶다면 꼭 들어보길 추천한다.
자, 이렇게 새로운 시도와 실험적인 요소가 많은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김종진이 음악적, 문학적, 철학적 소산과 노력에 대해 돌려받은 것은 ‘폭망(폭싹 망했다)’이었다.
음악적 완성도는 최고였으나, 대중성이 없던 음악은 결국 대중에게 외면받으면서 대중음악으로서는 흥행에 대실패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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