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고 #3/3

03. ‘독아’ 편과 ‘엄독’ 편에 대한 나의 생각

by 마지막 네오

03. ‘독아’ 편과 ‘엄독’ 편에 대한 나의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가 강의도 하고, 책도 쓰고 있다는 의미를 ‘성공’으로 읽고 있다고 봤다. 어쩌면 프롤로그에서 말한 ‘세상을 바꿀 리더’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라는 바가 같다고 해서 보편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바람과 실질적인 보편성은 다르다. 여기 어디가 ‘보편적인 독서법’과 관련되어 있는 걸까?


애초에 ‘내게 좋은 독서법이 당신에게도 좋다’라는 말은 보편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당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뇌를 가지고 있다고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단 생각만이 그러하지 않기에 당연히 거기에 따르는 행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은 보편성을 가진 존재’ 임은 맞지만, 이 결론은 보편성에 들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여기에서 말하는 ‘보편성’은 의미도 애매하다.


만일 10억의 사람이 있다면, 9억 이상의 사람이 가진 문화를 보편적인 문화라고 말하겠지만, 보편성은 나머지 1억의 사람을 제외함으로 인해서 합리적일 수는 있어도 합당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끌어온 뇌 과학의 근거를 들어 정체성의 개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뇌 가소성 원리에 따른 변화를 기반으로 ‘더 똑똑해지는 것, 더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귀결되면서 동문서답이 되는 느낌이다.


모두가 바라는 바가 현실화했을 때를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 뇌가 있으니까 내 독서법을 따라 하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니, 뭐 이렇게까지…’라고 속으로 말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그건 그냥 성질 더럽고 꼬투리 잡기 좋아하는 꼰대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다음으로 고정형 사고방식과 성장형 사고방식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다르게 본다.


저자는 1978년 일리노이 대학의 캐럴 드웩 연구팀이 간단한 질문으로 70명의 아이들을 ‘성장형 사고방식’과 ‘고정형 사고방식’으로 나누었고, 다른 상황을 연출하여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살피는 연구를 예로 들었다.


이 연구 외에 몇몇 비슷한 예를 들며 사고방식에 따른 정체성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정체성은 외부 환경, 즉 부모와 문화 또는 특정 상황에 따라 짧은 시간 내에도 변화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먼저 위 내용을 맞닥뜨리면서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질문은 “‘성장형’ 아이들은 왜 테스트 질문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선택했을까? 반대로 ‘고정형’ 아이들은 왜 테스트 질문에서 부정적인 답변을 선택했을까?”였다. 동시에 그것이 정말로 아이들의 정체성일까? 라는 의문도 떠올랐다.


먼저 내가 알고 있는 ‘정체성’은 특정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짧은 시간 내에 변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보통 긴 시간 동안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게 되는 본질을 ‘정체성’이라고 알고 있다. 뇌의 변화는 인정할 수 있으나, ‘정체성’이 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는 말이다.


연구에서 실행된 것은 문제 풀이였다. 구태여 말하자면 지능과 관계된 결과를 ‘성공’과 ‘실패’로 구분 짓는 방식이다. 그 결과를 ‘사람의 정체성’ 문제로 연결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되었다.


누구나 처음 맞이하는 문제를 맞힐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여기에서 강조한 것은 맞히거나 틀린 후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적했는데, 그 또한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판단이지 그것으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부정적으로 낙인찍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교훈을 아는 사람 역시 어떤 ‘경험’이 있었기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실패자’, ‘낙오자’처럼 구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저자도 지적했듯이, 사람마다 가진 환경, 즉 가족이나 문화, 직업, 취미 등 호불호는 다양하다.


실험에서 제시된 퍼즐 풀기를 친구들과 나란히 테스트받았을 때, 친구보다 늦게 풀거나 풀지 못했을 때 느끼는 열등감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고, 특히 그 대상이 어린아이였다면 이 실험은 단순히 잔인한 것이다. 즉 똑같은 문제 출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다름을 자를 대고 칼질한 것과 다름이 아니라고 본다.


거기에는 호기심에 따른 실험 결과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다른 여러 가지 인간 환경이 무시된 채 채점되어 ‘정체성’마저 낙인찍히는 희생자만 남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교육과 줄 세우기, 차별, 나아가 인간을 계급 서열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한 사람의 정체성은 몇 개의 테스트 문항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살면서 겪게 되는 긍정적인 경험과 부정적인 경험에 따라, 저자도 주장했던 대로 ‘뇌는 변화한다.’ 그러므로 성장형 사고방식과 고정형 사고방식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사람의 변화를 틀 짓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런 딱지를 붙이려거든 그 사람의 인생 전반을 살펴본 후에 조심스럽게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저자는 “그렇다면 우리는 독서를 위해 어떻게 자신을 바꿀 수 있을까?”라고 다시 묻는다.


‘독아’에서는 ‘뇌의 가소성’이니 ‘성장형·고정형 사고방식’이니, ‘정체성’이니 거창한 말들이 많이 나열되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일단 ‘지능’이나 사람의 정체성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본다.


의기소침한 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최종 결론은 아니다. 저자도 책에서 뇌 변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삶의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했다. 뇌의 변화란 곧 똑똑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뇌의 가소성은 말 그대로 환경이나 경험 등에 따라 어떤 주어진 상황에 맞춰 적응하는 변화를 말하는 것이지, 더 똑똑해지거나 멍청하게 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능’이 높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지능’이 높지 않아도 책을 읽을 수 있고, 생각도 할 수 있다. 세상 모두가 최고, 최상을 지향할 수 없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독서가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바뀌어야 올바른 독서가 가능하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이른다.


그래서 나는 ‘독아’ 파트를 ‘의지’와 ‘환경’의 문제로 읽었다. 저자가 운이 좋았다고 표현한 말도 운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세계의 경제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경제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300권이나 되는 책을 읽었다고 했다. ‘필요’가 작용한 것이다. ‘필요’는 ‘관심’을 동반한다. 관심의 실행으로 첫 책을 읽었다. 호기심이 한 권의 책으로 사라질 리 없다. 두 권, 세 권… 어느 정도 읽었을 때, 저자도 더 읽기를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말한 저자는 왜 계속해서 경제 관련 서적을 찾아 읽었을까?


저자는 자신 읽기(독아)를 잘 못한 것 같다. 저자는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오기도 의지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 의지는 아마도 저자가 당시에 처해 있던 ‘환경’이나 ‘처지’와 관계되어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책에 “깨달음은 경험에서 온다.”라고 적었다. 실패든 성공이든 경험해 봐야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래야 성장이 무엇인지 느낀다.


고정형 사고를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보지 않는다. 또 유전자에 따라 타고난다는 말도 상관없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그저 희망을 바라는 것이다. 행복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감정이 무딘 것이 아니라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스스로는 다 겪어봤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 겪어볼 만큼 겪어봤기 때문에 익숙해져서 무뎌졌다고. 예를 들어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은 대부분 공감을 부정하는 것이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공감하기를 부정하는 원인과 이유는 있을 것이다.


뇌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의지에 달려 있다. 선택의 문제는 많은 부분에서 환경에 달려 있다. 그러나 ‘필요’를 느끼면 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본능이다. 실패해도 상관없다.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험해 봐야 깨달음도 얻는다. 따라서 저자의 과정은 결코 운이 아니다.


예로 든 2007년, 중학생을 대상으로 성장형 사고방식을 교육할 수 있는지, 그 결과를 알아보려는 드웩 교수의 실험 역시 마찬가지다.


교육을 통해 성장형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가능했고, 효과가 입증되었다고 적혀 있다. 마찬가지라는 말은 내 생각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이다.


드웩 교수의 실험 내용의 허점은 ‘희망’이다. 실패하거나 좌절해도 얼마든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 드웩 교수가 아이들에게 준 것은 교육의 방식이나 가르침이었다기보다 ‘나도 잘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이었던 것이다.


이 실험에서도 결과를 내기 위한 테스트는 수학이었다. 성장형 사고방식의 교육을 받은 학생의 성적이 크게 올랐다는 것이다. 지능이 변화했다? 수학 문제를 더 잘 풀게 된 데는 지능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풀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을 위한 숨은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노력과 자신감은 희망이 있을 때 행하는 것이지 좌절한 상황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인간과 사회에 있어 보편성을 생각해 본다. 글 처음에서 뇌 과학을 토대로 한 보편적인 독서법이 광범위한 테두리에 비해 좁은 선택이라고 말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뇌가 있고, 누구나 상황에 따라 적응하면서 뇌가 변화할 수도 있지만, 그 상황 변화가 모두에게 맞는 보편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희망이나 행복, 소망과 같은 것은 비록 그 형태는 모두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있고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성공’이나 ‘세상을 바꿀 리더’가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바로 각자 바라는 희망을 가슴에 담고 있기에 끝없이 도전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사회적 성공, 경제적 성공’을 당연한 듯 보편적인 ‘희망’으로 치환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승리하는 데서가 아니라 ‘성취감’에 기뻐하는 것이다.


‘독아’, 나를 읽는다는 것은 이처럼, 사실은 준비가 아니라 시작이고, 과정이며, 동시에 결론이다. 내가 구체적인 독서법들보다 ‘독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얽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독아’와 ‘엄독’을 처음과 끝으로 구별해서 섰다. 읽은 내용을 망각하지 않으려면 반복해서 읽고, 이해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한 후, 인풋식 공부(읽기와 듣기)보다 아웃풋식 공부(쓰기와 말하기)가 돼야 한다고 한다.

‘물고기를 잡아서 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희망이 이끌고 의지가 밀어주는 자아가 아니라면, 엄독은 닿지 못할 단계일 것이다.


엄독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휴식이라고 생각한다. 수면을 제외한 모든 행동(생각하기, 질문하기, 쓰기, 걷기, 기타 여가생활 등)이 휴식이 되려면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 ‘독아’가 시작이면서 끝이라고 말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자신을 올바르게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마음에 평안은 없다. 자기 자신을 헤아린다는 건 죽는 날까지도 다 끝내지 못하겠지만,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함은 확실하다. 이후에 책을 펴 들었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할지’는 미로 속에서도 뚜렷하게 표시된 길처럼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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