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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Oct 28. 2023

내가 바라고 걱정하는 대한민국 #2/5

일상으로의 회귀

02.

긴 시간 동안, 주적은 북한이었다. 맞다! 북한이 독재체제를 유지하며, 우리와 화합할 생각이 없는 한 그들은 우리의 적이다. 북한을 편들 생각은 1도 없다. 다만, 민주주의 간판을 내걸고 국민을 속이며 독재하는 것보다는 아예 독재하겠다며 독재하는 건 적어도 비열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라를 둘 이상으로 가르는, 분열의 원인이 되는 빨갱이 놀이 또는 지역감정 같은 편협한 정치적인 굴레는, 이제 구시대적일뿐더러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만 인용되는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미사일을 쏘고 폭탄을 터뜨리는 전쟁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은, 한 사회 내부에서 이념적 갈등을 부추겨 갈라치기 하고, 사회 구성원의 민주적 합의를 가로막으며, 특정 권력과 특정 세력만을 옹호하고, 빈부로, 세대로, 지역으로, 성별로, 온갖 분열을 일삼으며 우리 사회를 쪼개고 쪼개는 일이다.


중국의 사상가 장자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하신 말씀이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했다. 외부의 적도 무섭지만, 진짜 패망의 원인은 늘 내부의 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념이나 인종, 문화를 비롯한 모든 차이에 대해 서로 부정하고 반목하는 순간, 국가의 개념은 물리적 경계선만 남아, ‘힘’으로만 맞서는 시대착오적인 형태로 남게 된다.


물론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위협한다면, 그것이 북한이 되었든, 일본이 되었든 심지어 미국이나 UN이라고 하더라도, 우린 맞서야 한다. 그것은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지 파괴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합당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히 해둘 것은, 위에서 말한 ‘힘’과 ‘자유’, ‘평화’와 같은 말들의 진정한 의미와 사회적 함의를 정확하게 알고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정치권에서 ‘국민’이라는 단어가 변질되었듯이, 어떤 연설문 형태를 통해 그럴듯하게 현혹하는 말로 이용된다면,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내부를 보자. 기득권 세력은 차이를 인정하고 보듬기보다는 차별을 정당화한다. 작게 쪼개지면 대항력이 약해진다는 점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혼란과 의미에 대한 왜곡은 생각보다 심각한 모순으로 나타난다.

가부장제의 권위적인 체제를 비판하면서, 정치권과 사회의 계층적 구조에서는 가부장 식 권위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높은 사람’, ‘높은 분’과 같은 의식은 버리지 못하면서, 영어식 평등이라며 무작정 반말하는 사회를 평등이라고 말한다.


부모의 부나 사회적 지위를 믿고 학우에게 잔인한 폭력을 가하면서도,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대에 입학하려 든다. 초등학생이 스승의 뺨은 때려도 국민이 대통령을 모욕하면 바로 검찰이 대대적으로 나서 압수수색을 실행한다.


희생자는 있는데 가해자와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사회는 1%의 특권층과 99%의 개·돼지로 축약된다. 각자도생과 약육강식이 판을 치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기회, 성공, 인맥, 경쟁만을 가르친다.


불공정은 약자를 생산하고, 아무도 관심이나 귀 기울여주지 않는 상황은 결국 전 세계 자살률 1위라는 타이틀을 유지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냥 우리 사회에서 활용이 끝난 쓰레기를 처분하듯, 잊힌다.


말 그대로 지옥 같은 현실에 누가 아이를 낳겠나? 배울 것은 온통 고통인데 누가 자식을 교육시키겠나? 아니, 그전에 결혼 자체부터가 점차 가능하지 않은 사회다. 이러한 정치, 경제, 문화를 포함한 모든 현실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절망으로 돌려놓는다.


절망이 앞에 버티고 섰다고 주저앉을 것인가? 우리의 삶은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이어야 하는가?


실학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생각한다. 현실을 잠식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방식에 덧입혀 다시 생각해도,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라는 진리는 변치 않는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도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거짓을 걷어내는 필연적인 원리이고, 그 올바른 힘을 인간 사회에서 지켜내야 하는 실천이 곧 이념이어야 하고, 정치여야 하며, 나아가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 사회에서 근본적인 악이자 어둠이며 그림자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모든 절망의 근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가? 내 생각에는 그중에 으뜸은 '친일주의'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모든 사건과 그에 대한 제멋대로의 해석, 분열 조장, 갈등 조장, 차별을 비롯해 빈부 격차와 신념, 교육, 사회 전체의 경제적 어려움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원인과 이유를 쫓아 올라가면, 시간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답은 늘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오점으로 남은 친일 세력을 깨끗하게 척결하지 못한 일, 그들의 세계와 시간이 이어지도록 허용한 일을 되짚어야 한다. 망령처럼 되살아나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최악의 그것!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척결해야 할 것은 단언컨대, '친일주의'이다.


새로운 이념 논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존의 문제이고, 후대를 위한 걱정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모두 함께 살아가기 위한 단순하고 명백한 증명이다.


국가를 미래로 끌고 가야 할 현재의 정치권을 보면, 작은 나라의 조그만 당 내에서 '친윤, 비윤'이니, '친명, 비명'이니 하면서 파벌 싸움에 정신들이 없다. 작은 나라에서 서로 권력을 잡아보겠다고 터무니없는 데만 관심을 쏟는 그러한 정치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으로 이끄는 독재적·제왕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이고, 이는 우리 사회를 갈기갈기 찢는 '분열'의 원천 외에 다른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치적 명칭 따위는 모두 허상이고 허울이다. 대한민국 정치는 여의도에 있는 작은 우물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개구리들과 같다. 국민은 천심(天心)을 원하지만, 그들은 개구리일 뿐이고, 우물가가 되어버린 핵심에는 친일주의 개구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이루는 공동체의 구성원이고,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운명체다. 그러나 여의도 우물과 용산에 숨어든 친일주의 개구리들은 소위 말하는 '사회 지도층'의 권력만을 취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 자기 주머니 채울 생각만 할 뿐, 무능·불통 그 자체다.


국민이 맡긴 직에 역할도 못 하고, 책임도 지지 않을 바에는 하루빨리 직함과 권력을 회수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3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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