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集 사랑하는 이에게…
달빛 서슬 내린 문 앞에 나와 앉아 있습니다.
늘 벽같이 서늘한 당신 모습이 다가왔지요.
아무리 애달프게 가슴을 비벼댄들
차갑게 서 있는 당신 말입니다.
아무리 마음을 얘기해도
대답 없는 당신은 그렇게 벽입니다.
나도 벽이나 되렵니다.
당신 맞은편에 그늘만 가득한 곳에 벽이 되렵니다.
달빛 솟은 날 같으면 바람을 느낄 수는 있을 테죠
그 푸른 바람이 마음 한복판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숨 내쉬며 겨우 웃어 보이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그런지 자격이 있나 봅니다.
내 자격은 '불가!'
세상에 사람이 많아도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건 자격이 충분한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기 때문인가 봐요.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하면 잘못된 얘기라 하고
특히 사랑함에 있어서는
그런 자격 따위가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그러한 자격은 분명히 있더군요.
사람들이 없다고 외치는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듯이
비슷한 형태로 그것은 작용합니다.
제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 있어도
그들은 결국 비슷해야만 합니다.
벽을 사모하는 사람은 벽이 되어야 하지요.
그것을 거부하면
그는 연인을 이해할 수 없어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한 남자가 있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를 위해서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
믿음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책에 나오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니고
20세기 말을 살아가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선남선녀였을 뿐입니다.
그 두 사람이 연애의 끝에 다다랐을 때
여자의 부모님은 말했습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니?
공부는 얼마나 했고
집안은 잘 사는지...
아버지는 뭐 하는 분이며
그 사람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니?"
딸은 어머니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였지요.
"그 사람은 만화가이며 시인이에요.
평범한 고등학교를 나왔고
공부에 취미가 없어
대학은 진학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두 분이서
작은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표정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확실히 굳어버립니다.
"안 된다!"
"왜죠?"
"그런 가난뱅이와 결혼하면
귀한 내 딸이 한평생 얼마나 고생을 할까?
나는 그런 놈에게 너를 결혼시키려고
애지중지 키운 것이 아니다.
너도 현실을 직시하고
남자다운 남자를 찾아서 연애를 할 것이지...
어디서 그런 만화 나부랭이를 하는 놈을 알게 되었니?
절대로 안돼! 차라리 엄마가 알아보마."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한참 연애감정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는 따지지 않게 되어있지요.
그건 이다음에 시간이 지난 후에
생각할 문제였던 거지
그 당시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엄마. 그는 재미있는 만화를 잘 그리고
늘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나에게 유익하고 재미있는 얘기를 해줘서
행복하고 즐겁게 해줘요.
무엇보다 그는 나를 많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어요.
저 또한 그를 죽도록 사랑한단 말이에요."
"그것은 네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너에게 아무런 소용없다.
여자는 듬직한 남자가 필요한 거란다.
돈도 제법 있어서 여자가 살림을 해 나가는데
초라함이 없게 해 주어야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고
입고 싶은 것도 마음껏 입고
사회적 지위도 있어서
높은 지위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너만 잘 되는 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잘 되는 것이니 얼나마 좋으냐?
가난뱅이 만화쟁이에게 시집 가면
항상 힘들고 배고픈 노동에 시달릴 테고
처음에는 네가 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것도 결국 분쟁으로 돌아올 게다.
풍요로운 것은 무조건 좋은 거야."
딸은 엄마의 정연한 말에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그녀는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있는
만화가 애인이 말해준 것과는
어머니의 말이 너무나 다른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순수한 얘기로
늘 삶에 지쳐있던 현실 속 그녀에게
마음에 평화를 가르쳐 주었으며
세상을 향한 순수한 눈을 만들어 주어
아름답게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녀도 그러한 것을 사랑하고
존경할 줄 아는 그가 좋은 것인데
어머니의 말은 아주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나 음악가의 작품에서
예술적 가치는 대중 앞에서 좋은 것이지
예술가 본인의 개인적 입장에서는
고된 생활을 면치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랑도 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서
아니면 그런 생활에 금방 익숙해져서
웃을 수 있다면
죽음이 데려가는 순간이 되어서는
참된 아름다움과 참된 슬픔을 쓰는
그 시인이나 예술가가 그리울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순수하고 맑았던
사랑이 그리울 것입니다.
"어머니 말씀이 옳은 말씀이야..."
만화를 그리는 청년은
젊은 애인의 말을 듣고 상심합니다.
그녀 어머니의 말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얘기였기 때문입니다.
무모한 도주나
낭만적인 반항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지만
그런 모든 것은 거대한 현실 앞에서 달라집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의
부유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한 번쯤 생각해보고 물러서야 할 때임을 직감합니다.
눈물은 하루아침에 바다를 이룹니다.
눈물은 겨우 옷가지를 조금 적셨지만
그들에게는 바다입니다.
온 세상을 다 삼킨 슬픔의 바다...
그렇게 맥없이 사랑을 포기하려는 남자에게서
배신감을 느낀 여자는 돌아서서 달려가 버립니다.
골목을 돌아서 그의 눈 밖에 머물게 되었을 때
그녀는 무너지는 듯한 세상을 느끼며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벅찬 슬픔을 감당 못하고
벽에 기대어 울고 맙니다.
주르르 벽을 타고 주저앉아 버리죠.
차가운 바람이 머리칼을 넘기고 옷자락이 흩날립니다.
그는 그런 모든 것을
미리 걱정하고 근심해오고 있었습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천천히 돌아섭니다.
갑자기 어깨뼈가 부서질 듯 아파오고
눈은 충혈되어 옵니다.
가슴은 그 이상입니다.
어떻게 사랑했는데...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못하고
붙들기는커녕 못난 모습으로 보낸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상심합니다.
그녀에게 해준 얘기 중에
이런 얘기를 했던 게 생각났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옆집 아이가
책가방을 새로 샀는데 너무나 예쁘고 좋아 보여
나도 엄마에게 그것을 사달라고 졸랐어.
엄마가 사주지 않자 엄마가 너무나 미웠지.
밥도 안 먹고 엄마가 속상할 일은 다 했지.
엄마는 어느 날 그 예쁜 책가방을
사 가지고 들어오셨어.
나는 너무나 좋아서 책가방을 들고
곧바로 달려 나가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지.
엄마가 왜 갑자기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둘러쓰고 있는지는 관심도 없었던 거야.
그날 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고 들어오셨지.
그날 밤 아버지 때문에 나는
비로소 엄마 머리에 하얀 수건이 있는 이유를 알았어.
엄마는 나를 위해 머리를 잘라 팔아 버리신 거야.
아버지의 술 주정은
그날 밤 결국
어머니를 다 죽을 만큼 때린 후에 끝났지.
어머니의 새파랗게 면도한 머리는
까맣게 멍이 들었지.
나는 마당에 찢어져 나뒹구는
새 책가방을 보면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이불 밑에서 울었어.
책가방 때문이 아니라
파르스름 달빛에 비친 엄마의 머리 때문이었고
검게 멍든 자욱은 나로 하여금
아버지를 죽이고 싶도록 밉게 만들었지.
'맨날 술만 먹고 들어와서
착한 엄마를 때리기나 하는 나쁜 아빠다' 하면서...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내가 나이를 조금 더 먹었을 때
나는 아빠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아버지는 어느 날
내가 그린 만화를 전부 찢어 버리면서
울부짖으면서 내게 말했어.
'이런 거 하지 마라.. 공부해라 공부...
너만이라도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 같은 사람 되지 말아야지.
너희 엄마를 봐라.
아빠같이 가난한 사람 만나서
저렇게 고생하시잖니.
너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고운 사람이란다.
너는 아빠가 너무나 밉겠지만
세상에서 너희 엄마를
아빠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아빠는 엄마의 고귀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엄마는 여전히 아빠를 그렇게 사랑하고 있단다.
아빠는 그 사랑이 너무 벅차서
엄마에게 잘해주고 싶어도
늘 이 모양으로 화를 내고 만다.
하지만 엄마는 천사처럼
그런 나쁜 아빠의 마음마저도 알고 있어서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는 것이
또 엄마에게서 사랑받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아직도 너희 엄마를 무척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날마다 보잘것없는
이 자존심 때문에
생활과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있는 거다."
그녀는 그가 이 얘기를 해 주었을 때
그저 한번 살짝 미소를 지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미소에 화답했지만
이미 그때부터
많은 차이에서 생겨나는 충격과
슬픔을 맛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 얘기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그가 현실적인 부분과
비현실적인 부분에 있어서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상심한 것입니다.
그녀의 분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전하려던 의미는 없어지고
그렇게 받아들여질 때
그는 자신이
벽 앞에서 얘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기 때문에
처절한 슬픔을 맛봐야 했던 것입니다.
"아빠를 미워하지 마라 얘야...
너희 아빠는 가난하고 어렵게 사시지만
세상을 올바르고 평화롭게 살아왔고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분이시란다.
아빠가 화를 내는 것도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아빠가 술을 먹고 괴로워하는 것도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아빠는 엄마가 이런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늘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거란다.
지금 이런 말을 너에게 하면
너는 잘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너도 이다음에 반드시 무슨 말인지 알 게 될 거야.
어떤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이것은 어머니가 아버지 안 계실 때
그에게 조용히 해 주신 말이었습니다.
그는 새삼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왠지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고 철이 든 그에게
이런 말들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배운 적 없지만
이미 다 알고 이해되었을 뿐 아니라
왜 그녀를 붙잡지 못했는지까지 알 것 같았으니까요.
그는 너무 슬픈 나머지
그 이해하기 싫은 이해된 부분에 대해
비웃음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행복이란 게 정말로 그렇게 물질적이고
현실적으로 충족되는 문제에 있다면
사람들은 왜 사랑이란 감정으로
서로에게 소비하는 것일까?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행복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한참 사랑이 무르익을 때였죠.
그때도 여전히 그는 가난했고
여전히 만화를 그리고 있었으며
여전히 강아지와 함께
일요일 오전에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시간이 조금 흘렀을 뿐인데...
봄에는 꽃이 피었고
여름에는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었으며
가을에는 겨우 다시 몇 편의 시를 쓸 수 있었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훈훈한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한 가지 변화는
그의 곁에 그녀가 없고
조금, 아주 조금 외로울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그렇게
달력의 뒷장으로 사라지던 어느 날
그는 친구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어느 대기업의
젊은 간부의 아내가 된 그녀는
처음에는 단란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꿈꾸던 생활을 영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불과 몇 년 만에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그녀를 속이고 그랬다는군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족한 여자라는 이유였습니다.
남자 집 안에서 그녀만이 외톨이가 되어
편견과 차별에도 울분을 참아가며
조용히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이었으나
그녀는 결국 '그 남자의 아내'라는 이름을 얻었을 뿐
진실한 사랑이란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부유함을 소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 부유함을 낭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함의 낭비가 대부분 그렇듯이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었으며
결국 그녀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는
부잣집 며느리 외에는
기억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녀 스스로가 그렇게 괴로워하던 어느 날
그 남자와 결국에는 이혼하였고
법정에서 위자료 문제로 싸움을 하였고
이제는 혼자가 되어 살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친구가 전해준 얘기는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그런 얘기였습니다.
그가 그녀를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못난 자신이 비켜주면
그녀의 어머니가 원하던 대로
좋은 사람과 좋은 집안을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무렵부터 그는 그녀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사치스럽고 단조로운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고
그 생활을 끝까지 유지해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해도
만화 따위를 그리고
어린 왕자 얘기를 감동적으로 떠들며
갈매기 조나단의 비상을 얘기하는
아이 같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차라리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서
왕비가 되고 금으로 된 왕관을 하였음에도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 있었다는
얘기를 해 줄 것을... 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그렇게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여 마실 때마다
쓰린 속은 오히려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랑이란 깊은 상처임에 틀림없습니다.
남자의 사랑이란
진실하게 마음먹으면
세월이나 공간이
다 소용없다는 말이 실감 났습니다.
초겨울의 찬 바람 속을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지나와
자기 자신의 작은 골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슬픔에 지쳐 쓰러지듯 누웠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는 생각하였지요.
그녀를 위해서 택한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골목길에서
그렇게 그가 스스로 자격이 없다며 포기했을 때
이미 아무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와 그녀는 그렇게 마흔이 넘었고
그녀도 혼자로 그도 혼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두 사람은 다시 해후하게 됩니다.
함박눈이 앞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많이 내리는 날 저녁에
교회에 들어서는 그녀와
교회를 나서는 그가 우연히 마주친 것입니다.
처음에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모르는 타인처럼 스쳐 지났지만
그는 열 걸음을 다 못 가서 뒤돌아보았고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젊은 날의 어떤 하루처럼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카페를 찾아 마주 앉았습니다.
"당신은 결국 나의 초등학교 시절
새 책가방이 되었구려"
"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또 어떤 경험으로 인해
새로운 사랑을 배웠을 테죠.
내가 이렇게 변화하는 동안
당신은 또다시 깨닫고 있었을 거예요.
나는 이제야 당신이 말하는 참된 사랑이란 게
어디에서 얻어지며 어떻게 배워가고
어떻게 익숙해지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그때는 당신도 어리고
나도 어려서 그 말이 전부 이해되지 않고
젊은 마음에
똑똑하고 논리적인 분석을 요구하는
답변만을 했던 것 같아요.
이제 당신이 말하고 알려주려던 사랑이란
결코 학식이나 현실적인 시간 안에서
머리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었더군요."
그는 이제 그런 대화에서도
여유 있게 미소를 그릴 수 있습니다.
"그 얘기를 당신께 해 드린 이유가
바로 사랑이었소.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늘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지는 것이기에
이해 따위가 필요 없는 거지요.
내가 당신께 그 얘기를 해서
이해시키려 노력했던 자체가
수치스러운 교육 같은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당신의 결혼생활에도 한때 사랑은 있었을 거요.
물론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그 사랑의 크기만큼 미움이 되어 버렸을 테지만.
당신은 적어도 나를 원망해도 좋소.
나는 당신을 사랑할 자격은 없었지만,
늘 그랬듯이 원망을 들을 자격은
아직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이제 소녀의 눈물이 아니라
여인의 눈물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나도 이제야 당신이 해준 그 말이
결혼생활과 현실에 대한
자각 따위를 말하려 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당신은 왜 그렇게 알아듣기 어렵게
얘기를 해야 했나요?
조금만 더 쉽게 내게 얘기했더라면
당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던 방식을
알 수 있었을 텐데요."
그것은 후회의 눈물이었던가?
이제 여인이 된 그녀는
편안하고 평화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초겨울 밤차를 타고
훌훌 가까운 섬으로 갔습니다.
비록 찬 바람이 불지만
바다의 품에 안겨보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사랑하는데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아닙니다.
나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사랑에는 자격이 없어요.
자격이 아니라 용기가 없었던 거였죠."
사랑하는 것과 인생을 사는 것에
닮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꼭 한 번뿐인 기회와
한 번뿐인 희망이란 것이죠.
단지 느끼기 힘든 두려움이 작용을 해서
스스로 용기를 잃게 만드는,
그런 역할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거예요.
그것을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우스운 소리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 한 번뿐인 희망을 저버린
용기 없던 나는
당신이 느낀 배신감을 원망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당신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었죠.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당신에게 푸른 하늘이었고
당신은 나의 별과 같은 존재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용기를 잃고 떠난 그 순간부터
자격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전에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히 살아갈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작용했던 것입니다."
"나 또한 후회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용기를 잃고
나를 저버린 것도
결국 나를 위한 배려였음을
나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저 당신이 한없이 미웠지요.
이렇게 나이를 먹어도
결국 다시 당신의
그 감미로운 동화를 들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이 전부가 될 것을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당신의 그 순수한 부분이
내 생각에는 그저 철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당신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당신의 순수를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것도
아마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요... 나는 여자예요.
그것도 사랑을 받아본 여자.
세상의 어떤 것도
당신의 그 순수했던 사랑만큼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답니다."
두 사람은 섬의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슬픔밖에 없군요.
우리가 이렇게 늙고 시간은 흘러가 버렸으니...
젊은 날의 순수했던 맑은 마음은
그대로 남아 내가 느낄 수 있지만
나는 이제 당신께
여자로서의 젊고 청순한 느낌은
하나도 줄 수 없어요.
저기 지고 있는 황혼이
우리 주위에 내려오면
당신의 그 웃기는 엉터리 시나 또 들려주세요.
그것이 이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마지막 동침과도 같을 테니..."
자, 이제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렵니다.
나는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여전히 벽 앞에 서 있습니다.
벽은 차갑고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이 되어갈수록 더욱 차가워집니다.
손으로 가만히 만져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눈물도 소용없고
이보다 더한 슬픔에 벅차
얘기를 해도 벽은 그저 벽입니다.
단지 그 벽이 그녀였다는 생각에
떠나지 못하는 게 문제지요.
어떤 착하기 그지없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주위에서 사라지면
슬픔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깊은 곳에서 자라나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그 상태를 벗어나 다시 웃으면서
희망을 꿈꾸기까지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미친 듯한 상태가 필요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여...
세상이 살아나는 이 시간...
이런 단어의 나열을
그저 보기 좋고 멋지게 보이려고 써 내린
조잡하고 나약한 글귀로 치부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리 멋진 미사여구가 붙은 고백보다도
소중한 가치를 마음에 담고 있다가
전하고 싶어 이러는 거랍니다.
바로 당신을 위해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지요.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나 없이도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널려있는
수많은 시련들은
이런 단어의 나열로 표현할 수 없고
우리의 연약한 사고의 힘으로도
풀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상대방에게 한 없이 상처만 줄 뿐이며
계속해서 애정을 없애기만 할 뿐입니다.
당신을 바꾸려는 게 아닙니다.
내 의견이나 생각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다가서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얼마든지 돌아서서
떠나갈 용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나는 내세울 게 없어요.
여전히 정신없이 살아야 하는
나약한 한 인간이기에
당신이 바라는 이상형에 맞지도 않을 테고
현실에 함께 머무르기에는
더욱 부적합할지도 모르지요.
오랫동안 못했죠. 사랑한다는 말...
당신이 그리워할 만큼
나는 그 말을 못 했습니다.
당신 또한 나에게 오랫동안 그 말을 못 했지요.
우리가 서로에게 그렇게 만든 모양입니다.
나 역시 어지간히 이기적인 모양입니다.
이제 이 오래고 긴 문장에 마침표를 달려합니다.
이 문장의 끝에
이해라는 말을 달지 않겠습니다.
아쉬움에 질질 끌고 온
지루한 얘기로만 기억하지 않길 바랍니다.
당신과 나에게 그리운 말...
'사랑합니다'를 다르게 써 본 것뿐입니다.
나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시집 '사랑하는 이에게...'의 연작시 중에서 가장 긴 시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 어린 시절의 내가 어떻게 이런 글까지 썼는지 믿기지 않는다. 한 40 먹은 아저씨가 쓴 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글은 20대 초반 때 쓴 글이다. 이 글을 썼던 날이 생각난다. 사연까지는 쓰고 싶지 않지만 참 비참한 경험을 한 날이었다. 아침까지 꼬박 잠들지 못한 채 한줄한줄 써 나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무려 35년 전에 썼던 글들을 찾았다. 바닷속에서 보물을 찾아낸 것만 같다.
이 시는 1987년 11월 4일부터 노트에 적어놓은 글 중에 한 편이다.
날짜 표기가 있는 것은 옮겨 적으나 날짜 표기가 없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어린 소년 시절의 습작이라 부족하고 엉망이지만 가능한 있는 그대로 올린다.
그 시절 순수했던 ‘소년의 나’를 그리워하며, 온통 사랑으로 분칠 해놓은 부끄러움을 꺼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