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luttered_사람_1
얼마 전 쌀로(SSALO)에서 담백하고 고소한 오메기케이크를 먹었다. 민정이는 쌀가루로 케이크와 마카롱을 만든다.
대학교를 다니며 1년 남짓 민정이에게 수학과 영어 과외를 해줬다. 고등학교를 마치며 부모님께 받던 용돈에서도 졸업을 하고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했다. 학교 정문 앞 큰 횡단도로를 건너 3-4분 정도 거리에 외삼촌댁이 있었는데 '사촌동생 공부도 좀 봐줘라'는 외숙모의 부탁을 거절할 마땅한 이유 혹은 명목이 딱히 없어 민정이의 과외선생님이 되었다.
뽀얀 얼굴에 순하고 착했던 민정이는 공부에 큰 흥미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학을 못 갈까봐 걱정을 해야 하는 성적도 아니었다. 바로 1-2년 전, 사십 명 남짓한 교실에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나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우리였다. 초중고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수학과 영어를 가르쳐왔던 경험으로 일주일에 2-3번씩 민정이와 함께 공부를 했다. 외숙모가 집에 계신 날은 저녁상을 차려 주셨고 바쁘실 땐 간식거리를 챙겨두고 가셨다. 부담스럽지 않고 딱히 어려운 점 없던 여러모로 감사한 용돈벌이였다.
공부 중간 중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계속 살이 쪄서 걱정이라는 여고생의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고민, 공부가 재미없는데 그렇다고 딱히 재미있는 걸 찾지도 못했다는 익숙한 푸념. 스무 살 고작 넘은 언니가 어떤 쓸만한 답을 줬을리 만무하지만 비슷한 고민으로 같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 수험생 이름표를 떼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게 그나마 어떤 위로 같은 게 되었을까. 어쨌든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오고 가며 우리의 공부는 끝이 났고 민정이는 도내 한 대학의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날짜와 시간이 정해진 고정된 만남이 사라지자 우리는 서로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몇 년 후 민정이가 서울에서 제과제빵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일본에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전공을 살려 구직을 하는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른 소식이 전해지니 안부조차 묻지 않고 지낸 긴 시간이 실감났다. 나는 1년의 휴학과 소심한 방황을 거쳐 대학을 졸업한 후 몇년 차의 경력을 달고 직장 생활 중이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보다 더한 고민과 방황으로 구석 구석 자기연민과 우매함이 서로 경쟁하듯 성장하던 시절이라, 한참 길을 달리던 누군가가 제동을 걸고 다른 길로 다시 출발했다는 소식이 참 반갑고 또 부러웠다.
몇 년이 더 흘러 작년 설 민정이가 집으로 인사를 왔다. 아마 십년은 넘은 것 같은데, 뽀얗고 순하게 잘 웃던 민정이는 이제 목련처럼 고왔다. 안부를 묻자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서 작업실겸 카페를 시작했다고 했다. 쌀가루로 케이크와 마카롱을 만드는데 주문을 받아 제작하는 작업량의 비중이 높다며 찍어둔 사진들을 보여줬다. 하얀 아이싱 위에 다양한 디자인을 입히고 전하고 싶은 문구를 넣어 완성된 케이크들은 마치 도화지에 예쁜 그림을 그리고 귀한 마음을 담아 만든 카드같았다.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달콤한 그림 카드.
쌀로는 자리를 잘 잡은 듯 보였지만 민정이는 자영업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쉴 틈 없는 노동에 몸이 고된 건 말할 것 없고 가게 운영과 관리에도 신경써야 할 게 많다고. 월급쟁이만 해 온 나같은 사람은 월급 받는 우리가 서럽지만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그만한(혹은 더한) 고충이 있고 서럽다. 10년 넘은 월급쟁이지만, 20년 가까이 자영업을 하셨던 엄마를 옆에서 봐왔기에 자영업자 민정이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위로 혹은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조언 같은 걸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37년 먹은 나이는 다 어디로 갔는지 '맞아 힘들지... 쉬어가면서 천천히 해. 조급한 것 없으니 여유있게.' 정도가 다 였다. 그래도 '나는 니가 그래도 부럽다.' 같은 속 없고 철 없는 소리를 안 해 다행이다.
시간은 항상 무언가를 남긴다. 20대의 민정이에게 하루가, 한 달이, 한 해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지만 그 시간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면 지금의 민정이가 있다. 나의 시간 역시 그러하다. 치열하게 흘렀던 20대, 속앓이가 깊었던 30대. 모두 여기까지 오는 길이었다. 아직도 어려운 게 많고 내 안의 우매함도 여전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이 쌓여 주는 귀한 것들에 감사함을 느끼는 날들이 조금씩 늘어난다.
오랫만에 오븐을 돌려 고소한 버터 냄새로 집안을 가득히 채우고 싶다. 오메기케이크 한 조각이 불러온 기억과 쓸데 없이 무거운 감이 없지 않은 상념을 갓 구운 스콘과 진하게 내린 커피로 소화시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