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사랑에 대해 모른다.
나는 이득을 쫓는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청백리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금전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말을 매 순간 들으며 성장했다.
당신들이 사시며 돈이 삶에 있어서 최우선의 행복이 될 순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부모님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지나치게 순수한 분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당신들의 자식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더 숭고하게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부모님의 이러한 교육 덕분에 나는 30살이 될 때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옥탑방에서 라면만 먹고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 따위의 말을 지껄이고 다녔다. 물론 내 주변에 있는 지인들은 내 그 말이 철없게 들린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사랑을 중요시 여기는 너라면 가능할 것 같다며 웃었다.
나의 20대의 연애는 다른 이들도 그러하듯 비슷했다.
여대로 진학한 나는 소개팅이나 미팅 등으로 남자 친구를 만났고, 대체로 동갑이거나 아니면 많아봤자 2살 위. 데이트는 주로 만나서 카페에서 공부를 하거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가끔 주말에는 이쁘게 차려입고 데이트. 생각해보면 거의 매일을 만났다. 그리고 매일을 만났어도 떨어져 있을 땐 카톡이나 전화로 상대의 안부를 물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그때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고, 나는 다양한 일을 시도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미대 졸업자의 삶이 그러하듯, 그림이 아닌 글로 취업을 해보려고 하다가 때려치웠고, 사진기도 손에 잡았다가 가족들 전부 다 어이없어할 만큼 미술 계통과 전혀 상관없는 생뚱맞은 길로 가기도 했다. 이렇게 청춘의 황금기를 2년 동안 쓰면서 알아낸 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 나는 영국에 있는 명문대로 진학했다. 입학 허가서를 손에 든 그때가 26살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보다 꽤나 어린, 연하 남자 친구를 만났다.
외국에서 3등 시민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설움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첫사랑이었다.
해외에서 태어나 쭉 해외에서 공부했던 전 남자 친구 같은 경우엔 당연히 바이링구얼이었고 나야 뭐 수업에 겨우겨우 따라가는 정도였으니 영어 관련해서는 내가 그 친구에게 많이 의지를 했고,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선 그 친구가 나에게 많이 의지했다.
사귀는 매일, 함께 있었다.
시간대가 맞으면 점심을 함께 먹었고, 저녁은 그 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을 내가 요리해 주기도 하고, 내가 귀찮아할 때면 그 친구가 볶음밥을 해주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예능을 틀어놓고 보기도 했고,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심도 있는 토론을 하기도 했다. 정말 시시껄렁한 장난을 치기도 했고, 학교의 빈 강의실에서 각자 공부하다 지치면 5분 정도 수다를 떨다 다시 공부를 한 적도 많았다.
2년 동안 이렇게 농도 있게 사귀었으니, 한국에서 만났던 전 남자 친구들과의 ‘믿음’, ‘애정’도 부분에서 질적으로 차원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 친구에 대해서 생각나는 건 커다란 무언가보다는 소소한 무언가.
헬스장으로 함께 운동하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비를 쫄딱 맞으면서 “What the fu**ing weather!”라고 소리를 지르며 마주 보며 낄낄거리며 웃었던 것. 그 친구는 유럽 국가 중 한 곳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 관련된 여행 다큐멘터리를 같이 보면서 내가,
“처음엔 어떤 영화 때문에 꼭 가고 싶었던 도시였지만, 너를 만난 뒤로는 네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여서 이곳이 더 가고 싶어 졌어.”
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친구와 헤어진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 연하였던 그 친구와 나의 삶의 속도가 달랐던 것.
그 친구는 한국으로 귀국해서 군대를 가야 했고, 나는 그 2년을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설령 그 2년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그 친구가 전역 후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닌, ‘기다림에 대한 책임감’으로 관계를 영위하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그 친구와 헤어졌을 때가 내 나이 29살이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만났던 친구, 회사 동기였다.
처음부터 그 친구에게서 물씬 풍겨지던 결핍의 냄새. 나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했던 사람. 분명 관계를 시작한다면 끝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만 그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만나자고 말했다. 그와 만나자고 말하기 전, '라면만 먹어도 서로의 마음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보자. 그리고 안되면 그때 가서 고민하자.' 그리 생각했으므로.
내 친구들은 전부 뜯어말렸다. 그런 연애는 20대 초반에나 하는 거지 지금에 와서 하는 건 무모하다고.
그렇지만 나는 늘 무모한 삶을 살았고, 그렇기에 이 만남이 두렵지 않았다.
마음에도 금전에도 여유가 없었던 그 친구를 위해 마음도 금전도 내가 더 쏟아부었다.
사랑 표현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 그 친구에게 내가 더 표현했다.
계속됐던, 기울어진 연애.
그 친구가 가족들의 빚을 갚느라 서브 잡도 있었기에 우리는 밖에서 데이트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자 나의 감정도 변해갔다. 처음에는 분명 호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가 무슨 관계일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모든 에너지와 감정을 탈탈 소진하고 나서야 나는 그와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인정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 수 있다면 라면만 먹고살아도 괜찮아.’라는 나의 말은 돈이 주는 무게감을 몰랐던, 철없던 나의 오만이었다는 것을.
그와의 만남에 마침표를 찍은 날은 내 남동생 결혼식이었고, 내 나이 31살이었다.
힘들었던 연애, 정신적으로 피폐했던 회사 생활.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했다. 아니, 어쩌면 2달 동안 울고 불며 날 잡던 그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퇴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는 정말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친구와 만나며 마음을 너무 소진해버려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좋아할 자신이 없었다.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집안 분위기상 결혼에 대한 압박은 매번 있었지만, 그럴 때면 나는 “지금 내가 직업적으로 불안정한데, 누가 나랑 결혼해주겠어요?”라고 대답했다.
퇴사한 김에 귀국 후 과감하게 포기했던 작가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6개월 동안은 그저 그리고 쓰는 것이 너무 좋아 꼼짝 않고 이젤 혹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습게도 사회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친구들과 만나면 늘 배려했고 대화를 먼저 주도해서 이끌어갔는데, 긴 시간 동안 사람을 안 만나다 보니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어떻게 배려해야 할지 등을 전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만나야만 하는 대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든 생각, 다시 연애를 해야겠구나.
친구와 달리 '연인' 같은 경우엔 연락과 만남이 필수 불가결하니 반복해서 사람과 연락하고 만나다 보면 떨어졌던 사회성이 돌아오리라, 믿었다. 그래서 남자 친구를 만들기 위해 소개팅을 미친 듯이 했다. 두 달 동안 20번 가까이했던 것 같다.
그렇게 소개팅에서 만났던 전 남자 친구.
우리는 대화가 늘 끊이지 않았고, 첫 만남부터 은연중에 나와 본인을 묶는 말을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앞으로는 널 혼자 고민하지 마. 같이 고민하자.”
또, 언제부턴가 상대가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조심 스래 꺼냈다.
사실, 결혼에 ‘ㄱ’ 자도 관심이 없던 나였지만, 상대와 결혼에 관련된 말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결혼하는 모습이 상상이 갔다.
행복한 연애였다.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이쁘다는 말을 10분에 한 번씩 했다. 그 말을 듣는 게 좋았다. 그에게 이뻐 보이고 싶은 마음에 힐을 신고 나온 내가 넘어질 뻔 하자 주저 않고, “업어줄까?”라고 말하던 그의 다정함이 좋았다. 그가 내뱉는 든든한 말들이 좋았다. 언젠가 여전히 불안정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넌 절대 회사 타입 아니야. 네가 만약 작가 생활하는데 돈이 없어서 힘들다면 내 월급 줄게.'
라는 말도 많이 했었다.
그의, ‘내가 언제든지 너의 방패가 되어줄게.’ 식의 마음이 이뻐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만나면 만날 수록 나는 우리가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감정 공유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 그래서 연인과 만난 기간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나누는 진심의 농도가 중요한 사람. 그러나 상대는 단계별로 하나씩 오픈하는 사람. 그리하여 만난 시간의 길이가 중요한 사람.
내가 그와의 ‘다름’을 적나라하게 느낀 마지막 데이트에서는 대화가 아예 없었다. 그리고, 그 데이트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사실, 내가 상대방에게 원한 건 큰 게 아니었다. 돈이 많지 않아도, 잘생기지 않아도, 집안이 좋지 않아도 전부 괜찮았다.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원했던 건, 그의 일상과 감정 속에 내가 촘촘히 채워지는 것.
회사 출근해서는 카톡으로 수다를 떨다가 퇴근 후에 만나 캔맥주 한잔하면서 함께 회사 욕을 하고, 주말에는 손잡고 한강을 간다거나 맛집 탐방하면서 “이거 진짜 맛있다. 그렇지, 자기야?”라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고. 또, 서로에게 집착을 하기도 하고 구속하기도 하면서 연애의 짜릿함도 즐겼다가, 가끔은 애인이 자기 삶의 영역을 침범하더라도 사랑하는 애인이니까, 라며 이해해 주고 넘어가 주는 것을 바랐다.
내가 원한 건 단지 이런 것들뿐이었는데.
이제 나는 연애가,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인 것 같기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 같기도, 상대방에 대한 적당한 포기인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