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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은성 Oct 12. 2020

삶은 거대한 역할극이고

나는 그곳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중이지

“너의 글은 잘 읽었어, 근데 엄만 네가 조금 밝은 글을 썼으면 좋겠어. 네 글을 볼 때마다 마음이 좀 그래. 네가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아서. 네가 지금 그리겠다고 구상한 그림도 그래. 이걸 누가 사겠어? 너무 어두운데.”


일요일, 날이 너무 좋았다.

하늘이 높고 푸르렀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었던, 가을이 성큼 왔구나를 느끼게 해 주었던, 그런 날. 

주말인데 침대에서 조금 더 뒹굴거릴까 고민하던 나는 창문을 타고 흘러넘치는 기분 좋은 햇빛 냄새에 항복을 선언하며 포근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씻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남산 꼭대기까지 운동 삼아 걸어 올라갔다.

내려와선 적당히 끼니를 챙겨 먹고, 인센스를 잔뜩 켜놓고 깨끗한 공기 속에 은은하게 퍼지는 향을 잠자코 지켜보다 거실에 넘실거리는 햇빛을 보고 오늘이 날이구나 싶어 침구 빨래를 했고, 청소와 걸레질을 했고, 베란다 청소를 했고, 창고 정리까지 했다. 창고에 케케묵은 아크릴 물감과 젯소, 썼던 캔버스가 있길래 전부 꺼내어 작업실로 옮겼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한 후로 아크릴 물감, 캔버스, 젯소를 새로 사야 하나 고민하던 나에겐 보물을 발견한 것 같았던 발굴이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저녁시간이었고 커피 한잔과 책을 읽었다.


어제의 나는, 전반적으로 모든 것들이 충만한 날이었다. 최근 이렇게 평안했던 날이 있었는가, 스스로 만족할 만큼. 

그리하여 내가 공유한 산문으로부터 우울이 느껴져 나를 걱정하던 엄마와의 통화에, 


“엄마, 나는.. 예전에도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삶이라는 거대한 역할극 속에서 타인들을 만날 때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근데, 그러한 내가 나의 음습한 감정들, 폐허와도 같은 상처. 이런 것들을 내가 타인과 공유하지 못하잖아요? 착한 사람이고 싶으니까, 타인에게 내 감정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니까. 근데 나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저 밑바닥까지 꺼내어 보여주고 위로받길 원해요. 근데, 너무 무거울 수 있으니까 못하겠어요. 그래서, 글과 그림으로 제 내면의 어둠을 풀어내는 거예요. 어찌 보면 인생 살풀이와 같아요. 내가 이렇게 아파, 저렇게 아파, 이런 게 힘들었어, 저런 게 힘들었어.라는 것을 쓰고 그리면서 제 글을 읽는 익명의 독자들에게 혹은 제 그림을 보는 익명의 관람객들에게 나의 슬픔에 대해 이해받길 바라거든요. 이러한 마음 상태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어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내 어둠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몰랐으면 좋겠어요. 이러한 마음으로 작업하는 거여서 글이 그림이 어두운 거예요. 그냥 작업을 하는 나는, 엄마가 아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엄마가 아는 나는, 엄마가 내 엄마라서 늘 자랑스럽고, 부모로부터 친구로부터 사랑받아 행복한 사람이고 오늘처럼 날이 좋다는 이유로 이토록 충만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요.” 


엄마는 그래도, 조금은 밝은 내용으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언젠가는 행복에 대한 작업을 할게요.라고 대답했다. 

전화가 그렇게 끝이 나고, 밤이 내려앉아 고요가 찾아온 집에서 가만히 앉아 인센스가 타들어가는 걸 지켜보다 아크릴 물감을 정리할 선반을 주문했고, 전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밤늦게나 온다던 Spring을 기다렸다.


그녀가 왔고, 나는 그녀와 삶의 어두운 면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화를 했다.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언니랑 어두운 대화를 할 때도 밝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 언니는 한 없이 어두워질 수 있는 말들도, 단어들도 이렇게 빛이 나게 말하잖아. 그래서 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너무 좋아.”


그녀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런 면도 있는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때로는 긍정적이고 때로는 부정적이며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적극적이며 때로는 감성적이고 때로는 이성적이며 때로는 우울하고 불안한 사람이지만, 때로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적은 글, 내가 그린 그림에 진하게 세겨넣어진 어둠에 대해서만 몰입되어 나라는 사람을 안쓰럽게 여기지 않기를.

그건 그저 나라는 사람의 부러진 자화상의 일부분에 불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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