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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솜 Jul 31. 2023

3주 차 프리라이팅

<세작교> 2023 책이 되는 에세이 (07/26/2023)

주제: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제목 사랑 속 갑과 을


무역회사에 취직하면서 거래처랑 영어로 통화를 해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 넘게 영어를 쳐다도 안 봤으니, 하루아침에 영어가 귀에 쏙쏙 박히고 입에서 쏼라쏼라 쏟아질 리가. 맘이 급해 며칠 밤을 새워서 영어책을 봤으나, 실력이 늘기는커녕 잠이 모자라 업무 시간에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이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잘릴 수도. 영어 실력 늘리는 법을 검색해 보니 다 한결같은 답변이다.

- 영어를 가장 쉽고 자연스럽게 배우는 방법은 외국인 친구를 만드는 거예요. 애인을 만들면 더 좋고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참나! 말을 1도 못하는데, 친구는 어찌 만드누? 갸들이 거저 나랑 친구 해주냐?’ 되지도 않는 소릴 한다며 콧방귀 뀌었다. 죽어라 해도 좀처럼 늘지 않는 영어. 포기하려던 찰나, 한 펜팔 사이트 배너가 눈에 들어왔다. 영어로 말하는 게 아니라, 쓰는 거면 해볼 만하지. 펜팔 친구 만들어 영어를 조금이라도 쉽게 배우겠다는 흑심 가득. 누가 영어를 잘 가르쳐 줄지, 사람들이 올린 프로필을 자세히 봤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넷! 나랑 만날 가능성이 1도 없으나, 영어를 친절하게 잘 가르쳐 줄 것 같은 미국에 사는 사십 대 아저씨를 골라 이메일을 보냈다. “한국에 사는 아무개인데, 영어를 배우고 싶다. 가르쳐 줄 수 있냐?” 하루 지나 회신이 왔다. 한국을 잘 안다며, 영어 배우고 싶으면 가르쳐 주겠다는 호의적인 답변이었다. 그렇게 두어 달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MSN 메신저를 깔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다며 메신저를 깔라고 했다. 채팅으로 또 몇 달을 보냈다. 전화 통화 해보겠냐고 물었다.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점점 난이도를 상향 조절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시키 순 선수였던 걸 그땐 몰랐다.


1년 반 정도 그렇게 이메일, 채팅, 전화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이 들었는지, 이 친구가 날 만나러 서울에 왔을 때, 우린 이미 연인이었다. 6개월마다 꼬박꼬박 나를 보러 왔다. 2003년에 군무원으로 발령받고 아예 한국으로 들어왔다. 4년간의 연애를 접고 2004년 1월에 결혼했다. 그 누구도 축복하지 않던 결혼. 아빠도 친구도 다 뜯어말리기 바빴으니.


누가 그랬더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을이 되는 게 사랑이라고. 남편은 날 처음 봤을 때부터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헌신적이었다. 열일곱 살이나 어린 나를 만났으니, 은연중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겼던 듯하다. 결혼 후에도 내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강호를 낳고 아이에게 집중하다 보니, 남편은 더 뒷전.


강호 돌 때쯤이었나. 표정이 안 좋던 남편은 그간 참아왔던 얘기를 하나씩 조목조목 짚어냈다.

- 결혼 후, 단 한 번도 아침에 잘 잤냐고  물었다.

-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다.

- 말을 하고 있는데, 끊고 네 말만 했다.

- 뭐가 먹고 싶은지 묻지 않았다.

- 퇴근하고 와도 반겨주지 않았다.

- 아이가 태어났는데, 왜 각방을 써야 하냐.


남편은 무리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자기를 봐줬으면 하는 마음, 그게 다였다. 나이 어린 게 무슨 벼슬이라고, 남편에게 갑질하고 진상 부렸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구나. 사랑이란 허울로 무례하게 굴었구나. 그런데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했구나. 별 불만 없이 잘 지낸다고 착각하던, 참 나쁜년이었다. 그 긴 시간을 어찌 참아왔을까. 마음이 아렸다. 말하지 않아서 몰랐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온 마음을 다해 남편에게 사과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마음에 독을 쌓아두지 않는다. 환한 미소로 아침인사를 하고, 바빠도 하던 일을 멈추고 남편의 말을 들었다. 뭐가 먹고 싶은지 물었다. 퇴근하면 따뜻하게 안아줬고 궁디도 토닥였다. 더 이상 각방을 쓰지 않았다. 남편이 날 보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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