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14일, 15일은 파라과이의 독립 기념일입니다. 파라과이라는 나라가 다소 생소하실 수 있지만, 사실 한국과 꽤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국가입니다. 특히 70년대엔 많은 한인들이 이민을 가 정착했고, 지금은 파라과이의 발전을 위해 많은 협력 사업을 진행 중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1811년 독립을 선언했던 파라과이의 독립 과정 역사를 간단히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18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금의 파라과이 지역은 라 플라타 부왕령에 속해있었습니다. 라 플라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이자 행정 중심지로 설립했고, ‘인텐덴시아’ (intendencia)라 불리는 더 작은 규모의 관할 지역으로 나눠 영토를 통치했습니다.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스페인 식민 제국을 세 개의 부왕령으로 쪼갠 뒤, 부왕령 내에서도 더 세부적으로 관할 구역을 나눠 행정 업무의 효율성을 늘렸습니다. 아래 '지도 <1>'에도 나와있듯이, 파라과이는 라파스, 코차밤바, 포토시와 같은 인텐덴시아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중남미에선 1800년대 초부터 독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라 플라타 부왕령에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가장 먼저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810년 5월 25일에 시작되어 ‘5월 혁명 (Revolución de Mayo)’이라 불리는데, 이를 통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알리는 첫 신호탄을 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닌 인텐덴시아였습니다. 몇몇 인텐덴시아의 정치 엘리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독립을 크게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뒤, ‘세금을 더 내라’, ‘부에노스아이레스 말을 따라라'라는 등 계속해서 모든 일에 개입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텐덴시아 입장에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속하느니, 이 기회에 차라리 따로 분리를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파라과이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 사람들은 ‘리오 플라타 강’ 사용권을 두고 시비를 거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José Gaspar Rodríguez de Francia)는 이 점을 적절히 활용해 파라과이의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결국 1811년 5월 14일 파라과이 독립 선포의 의미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도 있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영향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의미도 가졌던 것입니다.
독립 선포 이후, 파라과이의 국가 건설 (nation building)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내적으로는 프란시아가 대통령이 된 뒤 20년 가까이 독재를 했고, 외적으로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라과이의 독립은 1811년이었지만, 이웃 국가들로부터 정식 국가로 승인된 때는 1840년이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국 조차도 파라과이를 1852년에서야 공식 국가로 인정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봤을 때, 독립 이후 파라과이의 국정 운영 과정은 순탄치 않았던걸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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