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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Jun 14. 2022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결말


“아르헨티나에도 ‘독도 문제’와 비슷한 일이 있다?” 편에서 본 것처럼, 말비나스 섬을 둘러싼 분쟁은 1833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아르헨티나가 독립한 해가 1816년이니, 거의 아르헨티나 탄생 시점부터 함께한 것입니다. 영국이 강제로 섬을 차지하며 시작된 영토 분쟁은, 여전히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양국 간 말비나스 분쟁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 1982년 벌어진 ‘말비나스 전쟁’ (혹은 포클랜드 전쟁) 때부터 였습니다. 1982년 4월, 약 4천여 명의 아르헨티나 군대는 포클랜드 제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군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함대를 이끌고 섬에 상륙한 아르헨티나 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영국군을 압도했고, 비교적 손쉽게 섬을 탈환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국이 보복 전쟁에 나서지 않을 거라 판단했는데, 영국이 본토에서 12,000km나 떨어진 섬을 위해 굳이 베팅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영국 내에도 전쟁에 회의적 시각이 있었으나,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강경한 방식으로 대응하기로 합니다. 육-해-공군 모든 전력을 총동원한 영국은 아르헨티나 함대를 침몰시키며 승승장구했고, 결국 전쟁은 2개월 만인 6월 14일 영국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전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쟁 다큐멘터리에도 잘 나와있고, 역사책이나 ‘포탄의 섬광’ 같은 영화에도 자세히 묘사돼있습니다. 따라서 남은 글에서는 당시 전쟁을 시작한 아르헨티나 정부, 실제로 전쟁에 참여했던 아르헨티나 군인들, 그리고 전쟁을 지켜본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입장을 짧게 살펴볼까 합니다.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의 상황과, 전쟁 이후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헨티나 참전 용사 (사진 자료: ser argentino)


먼저 말비나스 전쟁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의 판단 미스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석유 파동으로 아르헨티나에 경제 위기가 닥치자, 군부 정권은 위기를 극복하고자 말비나스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국민들의 애국심을 높이고 경제 위기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이 부분에선 왠지 조지 오웰이 쓴 소설 1984에 나오는 ‘전쟁은 평화다’ (War is Peace) 문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르헨티나 군 정권이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권력 연장을 위해 일으킨 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이와 함께 군부 정권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쟁을 일으킨 건 아르헨티나 정부였지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당연히 아르헨티나 군인들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군은 649명이 죽고 1,650명이 부상 당했습니다. 그리고 희생된 아르헨티나 군인들 중 70%가 25세 미만의 젊은 군인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전쟁 용사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몇몇은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에는 말비나스 용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있는데, 바로 스페인어로 생존을 뜻하는 ‘Sobreviviendo’입니다. 노래는 아르헨티나 베테랑의 씁쓸한 감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리고 우리는 겨우 살아가고 있다. 살아남아, 이 세상을 헤매고 있다.” (Y nosotros apenas sobreviviendo... Ando por este mundo, sobreviviendo)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목숨 바쳐 참전했던 모든 군인들은 국가 영웅이지만, 정부의 잘못된 선택으로 피할 수 있었던 희생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1982년 벌어진 반군부 시위 (사진 자료: RPD)


마지막으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포클랜드 전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처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전쟁을 지지했고, 묵혀왔던 반영 감정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한 뒤 전쟁의 광기 대신 이성적인 생각을 통해 당시 상황을 되돌아봤고, 전쟁의 시작이 군부 정권의 의도로 시작 됐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시위를 통해 군부 정권의 퇴진을 외쳤고, 말비나스 전쟁 용사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쟁이 패배로 끝났다고 해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말비나스 섬을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여전히 말비나스 주권 회복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으며, 영국과 전쟁이 아닌 협상을 통해 말비나스를 완전히 아르헨티나 영토로 만들고자 합니다. 마치 한국의 독도가 갖는 의미가 영토를 넘은 상징성이 있는 것처럼, 말비나스 지도 그림은 아르헨티나 거리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쟁의 아픔이 있었지만, 여전히 말비나스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영토 회복 이상의 중요한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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