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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Jun 20. 2022

'핫라인'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문에 생겨났다?


쿠바 미사일 위기  세계를 3 대전 직전까지 가게 만든 냉전 시대의 대표 사례입니다. 극적인 협상 끝에 미국은 터키 핵무기 철수, 소련은 쿠바 핵무기 철수를 약속하며 충돌을 피했는데요. 이후  나라는 공격 모드에서 화해 모드를 취하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조금씩 바꿔 나갑니다.


양국이 취한 화해 조치  하나가 바로 핫라인 (hot line) 설치였습니다. 여기서 핫라인이란 우발적인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비상용으로 쓰는 일대일 직통 전화를 의미합니다. 국내 뉴스 기사에서도 “북한과의 핫라인이 끊겼다”, 아니면 “재개통 됐다”로 가끔 언급되곤 합니다.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대중화된 ‘핫라인이란 단어는 외교에서 ‘소통 창구 뜻하는 하나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쿠바 미사일 위기가 끝난  바로 핫라인이 설치된  아니었습니다. 미사일 갈등은 1962 10 28일에 종료됐는데, 이후  8개월에 걸친  논의 끝에 직통 라인을 만들기로 의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1963 6 20, 미국과 소련 대표들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직접 통신 회선 구축에 관한 양해각서" 서명했고, 이후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를 잇는 핫라인이 개설됩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한 장면 (사진 자료: 유튜브)


한편 미국에는 ‘핫라인 관련된  가지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누구도 핫라인이 전화기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대중들 사이에서 “대통령이 쓰는 핫라인은 전화다."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겁니다. ‘핫라인=전화기공식을 만든 데에는 1964 개봉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영화 속에는 미국과 소련 관계자들이 전화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때부터 ‘핫라인 연결은 저렇게 전화로 하는구나'라는 인식이 대중들에게 심어진 겁니다.


이후 수많은 영화와 비디오 게임에서도 전화기를 미국-소련 간 핫라인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대중문화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 핫라인은 전화기였던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실에서의 핫라인은 소련의 크렘린과 미국 국방부 펜타곤 사이에서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는 텔레타이프 (Teletype)였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직접 대화가 이뤄지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말이 잘못 해석될 경우가 있어 오직 텍스트로만 의사소통을 주고받았던 겁니다. (참고로 핫라인이 위성을 통한 연결로 업그레이드된  닉슨 대통령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핫라인으로 사용된 텔레타이프 (사진 자료: VOA)


쿠바 미사일 위기로 생겨난 미-소 최초의 핫라인은 상상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또 기능적인 제한도 있어 의사 전달에 시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수백 번이 넘는 핵전쟁 위기가 있었던 걸 감안해 보면, 핫라인은 두 나라 간의 중요한 협상 과정에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존슨 대통령은 이스라엘-아랍 국가의 ‘6일 전쟁’을 멈추기 위해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과 핫라인으로 협상했고, 카터 대통령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반대하기 위해 핫라인을 사용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냉전이 끝나면서 양국 간 핫라인의 역할이 줄어들긴 했지만,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러 사이 핫라인이 다시 구축되는 등 여전히 외교 관계에서 요긴한 소통 수단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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