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5년 8월 6일은 볼리비아의 독립 기념일입니다. 다른 남미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요. ‘볼리비아’ (Bolivia)라는 나라 이름도 사실 '볼리바르' (Bolivar)에서 유래됐으며, 첫 번째 대통령도 볼리바르가 맡았을 만큼 그와 밀접한 연관이 많은 나라이기도합니다.
사실 볼리비아의 독립을 위한 싸움은 1825년 훨씬 이전부터 일어났습니다. 1809년 아르헨티나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아 수크레와 라파스 지역에서 처음 독립 조직이 생겼고, 스페인 군에 저항해 본격적인 싸움을 벌였습니다. 한 때 볼리비아 지역은 아르헨티나 독립 리더인 후안 호세 카스텔리, 마누엘 벨그라노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스페인 충성파들에 의해 모두 진압되며 모멘텀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독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싸움은 게릴라로 이어졌습니다. 역사에서는 이 게릴라 운동을 Republiqueta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게릴라 부대는 티티카카 호수, 수크레, 산타크루즈 등 총 6개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나가며 스페인파를 계속해서 괴롭혔습니다. 원주민들까지 합세한 게릴라는 정말 힘든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1825년 독립을 이룰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저항을 계속해나갔습니다.
볼리비아 게릴라들이 소규모 전투를 이어나가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는 볼리바르, 산마르틴, 수크레가 이끄는 독립군의 계속된 승전보가 들려왔습니다. 특히 1824년 8월과 12월에 벌어진 후닌 전쟁과 아야쿠초 전쟁은 사실상 스페인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버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1825년 4월, 수크레는 볼리비아 남쪽 투물사 전투에서 승리하며 사실상 마지막 남은 스페인군을 물리쳤고, 볼리비아의 주요 지역인 차르카스 (Charcas)로 거침없이 진격해 나갔습니다.
볼리비아의 수도 수크레에 모인 볼리비아 각 주 대표들은 1825년 7월 독립 선언문에 들어갈 주요 내용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특히 오랫동안 주의를 기울인 현안은 볼리비아의 '독립' 혹은 '통합' 여부였습니다. 당시 볼리비아는 (1) 아르헨티나와 통합하거나, (2) 페루와 통합하거나, (3) 직접 독립 국가가 되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남미를 꿈꿨던 볼리바르는 볼리비아 (당시에는 차르카스라 불렸던)가 페루에 합병되길 원했지만, 수크레가 이끄는 대표단들이 모인 의회는 독립국이 되는데 합의하며 8월 6일 선언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몇몇 역사가들은 볼리비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페루-볼리비아 연합을 원했던 볼리바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볼리바르는 볼리비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지만, 5개월간의 짧은 통치를 마치고 다시 그란 콜롬비아로 돌아가게 됩니다. 빈 대통령 자리는 수크레가 맡아 다스리게 됐고, 재직 기간 동안 원주민들을 돕기 위해 세금을 줄이고 토지 개혁을 실시하는 등의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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