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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Oct 26. 2022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  


중미 국가들끼리 벌였던 전쟁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아무래도 축구 전쟁이 아닐까 싶습니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가 벌인 전쟁으로, 100시간 전쟁으로도 불리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축구 전쟁이 있기 100여 년 전, 엘살바도르는 이웃 국가 과테말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1863년 2월 시작돼 같은 해 10월 26일에 끝난 이 전쟁은 ‘1863년 전쟁' 혹은 ‘제1차 과테말라-엘살바도르 전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전쟁이 시작된 가장 큰 원인은 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던 ‘카톨릭 교회’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중남미 정치 역사를 살펴보면, 독립 이후 초기 정치는 보수와 진보 이념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보수 세력의 가장 큰 특징은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어느 정도 허용했다는 점이었습니다. 1860년대 초 과테말라 대통령이었던 라파엘 카레라 (Rafael Carrera)는 보수 출신으로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특권을 주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반면 엘살바도르의 헤라르도 바리오스 (Gerardo Barrios)는 진보 이념을 가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1859년 호세 마리아 페랄타를 대통령직에서 몰아낸 뒤 스스로 대통령이 됐고, 카톨릭 교회의 권력과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는 비교적 가까운 외교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 권력을 둘러싼 두 정권의 상반된 견해는 갈등의 씨앗이 됐습니다.


1862년 바리오스는 카레라를 향해 본격적인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두둔하는 카레라를 향해 "야만인"이라 부르며 공격했고, 이에 카레라는 바리오스의 거만한 태도를 비난했습니다. 나아가 카레라는 엘살바도르 침공을 준비했고, 다음 해인 1863년 2월 두 국가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리오스의 엘살바도르 군대는 코아테페케 (Coatepeque)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과테말라 군을 막아내며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6월 과테말라가 2차 침공을 강행했을 땐 막아낼 병력이 충분하지 못했고, 엘살바도르 보수 세력마저 카레라를 지지하며 열세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10월 26일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는 포위된 지 한 달 만에 함락됐고, 바리오스가 도망가며 전쟁은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보수 세력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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