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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Nov 01. 2022

영국의 식민지였던 안티구아 바르부다의 독립


1981년 11월 1일. 약 35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안티구아 바르부다가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안티구아와 바르부다 두 개의 섬으로 이뤄진 이 나라는 인구가 총 9만 명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나라인데요. 1960년대부터 독립을 이룬 다른 캐리비안 국가보다는 조금 늦은 것으로, 세인트 키츠 네비스에 다음으로 독립이 늦은 나라이기도합니다.


역사를 보면 안티구아 바르부다를 처음 발견한 건 콜럼버스였습니다. 콜럼버스는 1493년에 이뤄진 2차 항해에서 섬들을 발견했고, 스페인어로 오래된 이란 뜻을 가진 안티구아와 수염이란 의미에 바르부다라는 이름을 섬에 붙였습니다. 특히 바르부다는 야자수에 붙어있던 이끼류를 보고 수염이라 묘사한 것으로, 다소 독특한 이름이 지금까지 섬 명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가장 먼저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안티구아 바르부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적들이 점령하게 됐고, 뒤이어 영국이 공식으로 식민지화를 해 이주민들을 정착시켰습니다. 1632년부터 두 섬을 다스린 영국은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섬을 발전시켰고, 20세기 중반까지 큰 문제없이 통치를 이어왔습니다. 물론 중간에 가혹한 노동을 견디지 못했던 흑인 노예들의 저항이 1701년과 1831년에 일어났지만, 본격적인 독립 운동으로까진 이어지지 못합니다.


안티구아 바르부다가 독립을 이루게 된 가장 큰 전환점은 노동조합 설립이었습니다. 베르 버드 (Vere Bird)는 1939년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어 안티구아 바르부다 내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정치 운동을 시작했고, 곧이어 안티구아 노동당 (ALP)을 조직해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는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1960년대부터 독립을 위한 협상을 이어나갔고, 1981년 수도 세인트 존에 유니언 잭 대신 안티구아 바부다 국기를 게양하며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독립 과정에서 안티구아 바르부다의 가장 큰 문제는 두 개의 섬을 분리시킬 것인지, 아니면 연합해 나라를 형성할 것인지 였습니다. 당시엔 바르부다 섬에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하나의 국가가 되는데 합의했지만, 분리 문제는 이후 계속해서 정치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바르부다가 독립을 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교적 월등한 경제력으로, 안티구아에 기반한 정치에 의존하기보다 독립을 통해 더 많은 자율성을 원하는데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20년 의회가 바부다 분리 가능성에 대한 결의안 보류하면서 바르부다의 독립이 실현되기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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