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차 : 점촌에서 조령산 자연휴양림까지

2018년 12월 21일

by 김정환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모텔에서 수건 한 장을 얻었다.


오늘은 조령산 자연휴양림 내 복합휴양관에서 자야 한다. 그런데 세면도구나 수건은 각자 준비란다. 달리 수건 파는 곳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아 모텔 주인에게 '돈을 지불할테니 수건을 한 장 살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한 장 드리겠다며 바구니에 수건을 담아 문 앞에 두셨다. 감사하다. 바구니에 초콜릿 두 개를 놓고 숙소를 나섰다. 8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다.



다른 지역 소도시에 비해 점촌의 아침은 비교적 활기차다. 편의점에 들러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다.



오늘 일정의 하이라이트는 조령(문경새재)을 넘는 것이다. 우선 점촌을 벗어나 3번 국도를 따라서 조령까지 북상할 계획이다.


과거에 이곳 문경은 탄광이 발달했던 곳이다. 한때 호황을 누리기도 했지만 그늘도 깊었을 것이다. 길가에 진폐증으로 고통받은 광부들을 돕기 위한 '진폐재해자협회'가 보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포니 2' 픽업트럭도 있다. 1982년부터 생산되었고 1990년 1월에 단종되었으니 아무리 짧게 잡아도 30년은 된 모델이다.



대로변으로 접어들자 아침부터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연말에 도로공사가 많은 건 남는 예산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낭비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 다음 해 쓸 예산을 정확히 책정할 수도 없을뿐더러, 예산에 딱 맞게 살림을 운영하면 차후 예산을 늘리는 데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연말 도로공사를 욕하기보다는 연중 예산을 제대로 쓰는지에 감시와 관심을 기울여야 것이다.



어느덧 점촌을 벗어났다. 부지런히 지방도를 따라 올라간다.



점촌 외곽에는 아직도 연탄공장이 돌아가고 있다. 과거에 비하면 연탄 수요가 크게 줄었지만 저소득층이나 영세 농민들에게 연탄은 여전히 중요한 난방 자원이다.


그런데 최근 연탄값이 올라 이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화석연료 생산 감축을 위한 국제 협약에 따라 정부는 연탄 생산 보조금을 2020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 보조금 덕에 원가보다 싸게 판매되던 연탄값이 오르고 있는 이유다. 단가가 높아지면서 연탄 기부도 크게 줄었다고 하니 걱정이다.



조그마한 마을길로 들어서자 길가의 트럭에 닭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살코기를 발라내고 남은 육수용 뼈로 보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미래 세대는 현 시대의 지층에서 닭뼈 화석을 발견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고생대의 삼엽충, 중생대의 공룡처럼 지금 시대의 표준화석은 닭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개체 수가 진화의 승자를 가르는 기준임을 고려하면 웃긴 얘기만도 아니다.



마을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벌판인데 발전의 청사진을 내세워 투자를 권유하는 입간판이 서 있다. 인근에는 그 발전을 기다리다 지친 듯한 폐가들이 기울고 있었다.



드디어 3번 국도와 다시 만나는 지점까지 왔다. 근처에 국군 체육부대가 있다. 2015년 문경에서 열린 세계군인체육대회를 기념하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의 상징물 너머로 국군 체육부대의 시설들이 보인다.



벤치에 앉아 어제 산 슈크림빵을 먹으며 숨을 돌렸다. 지금까지는 일종의 워밍업이다. 이제부터 국도를 따라 조령 입구까지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이 근방에서 3번 국도는 '문경대로'라 불린다. (어제 상주에서 올라올 때에는 '경상대로'였다.) 조령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강과 산 사이로 지나기에 중간중간 빠져나갈 만한 시골길도 없다. 그저 쌩쌩 달리는 차들을 마주하면서 주야장천 걸어야 한다.



도로 옆으로 강이 흐른다. '지방 2급하천'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건 옛 표지가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이다. 지방 하천을 '지방 1급', '지방 2급'으로 나누던 법령은 2008년 개정되어 지금은 '지방하천'으로 통일되었다. (지방하천보다 중요도가 높으면 '국가하천', 낮을 경우 '소하천'으로 분류된다.)


이 영강은 낙동강의 제1지류다. 낙동강이 끝나는 부산에서 출발해 열흘째, 나는 아직도 낙동강 수계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낙동강 수계는 정말 넓고도 길다.


참고로, '낙동강'의 이름은 '상낙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다. '상낙'은 상주의 옛 지명이다.



영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높으면서도 부드러운 산세에 둘러싸인 굴곡 구간이 나타난다.



강 건너편에 문경 불정역이 있다. 지금은 레일바이크로 쓰이는 폐역이다. 자전거 국토종주의 인증센터가 있어 종주 때 들른 기억이 있다.



영강 위로 놓인 교량 어딘가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교량 연결 부위의 PVC 파이프가 끊어져 삐걱대는 소리다. 신고라도 해야 하나, 덜컥 걱정이 됐지만 낡은 파이프의 균열이 교량의 안전에 큰 위해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그 소리는 참 거슬린다.


입체적인 풍경은 인상에 깊이 남는다. 위로는 중부 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차가 다니는 국도 옆으로는 자전거 도로와 레일바이크용 철로가 나란히 이어진다.



철길 옆으로 버려진 듯 놓인 정자에 앉아 잠시 쉰다. 이 계절에 이 길을 사람이 걸어 지날 리 없기 때문인지, 정자 앞 간이 화장실 안에는 꽤 오랫동안 손을 타지 않은 화장지가 눅눅하게 걸려 있었다.



인공 암석으로 만든 터널이 나타났다. 내겐 문경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구조물이다.



이 인공터널에는 이상하리만치 애착이 간다. 터널을 통과하면서, 그 후에도 계속 돌아보게 된다.



저 왼편으로 자전거 국토종주 때 달렸던 길이 보인다. 이름이 예뻐서 잊혀지지 않는 '소야 벚꽃길'이다.



마성읍 근처, 건너편 의원 간판을 유심히 살펴본다. 이름은 '의원'이지만 진료과목을 보면 그야말로 종합병원이다. 이 근처에서 환자는 대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일 텐데, 가까운 곳에 여러 가지 불편을 살펴 줄 의원이 있다는 건 퍽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열두 시 반이 넘었다. 아침에 숙소를 떠나 근 다섯 시간을 걸어왔음에도 아직 문경읍에 미치지 못했다. 몹시 지친다. 조령을 넘을 생각만 하면서 조령까지 가는 길에 대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밤 숙소에서 조령 입구까지만도 25km다. 거의 하루 일정에 해당하는 거리인데, '해가 지기 전에 문경새재를 넘어야 한다'는 조급증만 앞섰으니 지칠 만도 하다. 단조로운 국도길도 한몫했다.


생각해보면 구미에서 상주까지 걸었던 8일차엔 중간목표를 정한 덕에 40km가 넘는 거리를 그럭저럭 견뎌 냈다. 이 날은 마음만 앞서 그러질 못했다. 중간목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던 하루다.


문경새재 가는 3번 국도는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드디어 진안육교 부근에서 국도를 벗어나 '새재로'로 접어든다. 여기까지 꼬박 여섯 시간을 걸어왔다. 새재를 넘기도 전에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다.


저 앞에서 좌회전하면 문경새재로 이어지는 '새재로'다.


새재로를 걷다 보니 낯이 익다. '최양업 신부 선종지'를 만나자 무릎을 쳤다. 자전거 국토종주 때 잠시 멈춰 안내문을 읽고 둘러보았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1821~1861)는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다. 첫 번째 사제인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후 방방곡곡에서 전교와 성사 집전을 하다가 과로에 질병이 겹쳐 이곳에서 선종했다. 천주교에서는 김대건을 '피의 증거자', 최양업을 '땀의 증거자'라 부른다. 현재 시성(성인으로 추대되는 것) 과정에 있다.



조령으로 진입하는 길에는 커다란 문이 서 있다. 본격적인 조령 옛길은 여기서부터 또 한참 올라가야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위안이 된다. 더 늦기 전에 오늘의 '본경기'로 접어들었다는 안도감이다.



걷다 보니 오른편에 사과를 파는 곳이 있다. 대구나 영주처럼 문경도 사과가 유명하다.


허기지고 피곤한 상태에서 사과를 보자 일시에 군침이 돌아 몇 개 살 요량으로 들어섰다. 두어 개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비닐봉지 가득 담아 2천 원에 건네주신다. 아마 고단한 여행길의 나그네에게 인심을 베푼 것이리라. 나중에 택배 주문이라도 할 요량으로 명함 한 장을 받아 나섰다. 감사하고 뿌듯한 마음에 발의 통증도 잠시 잊었다.


아주머니는 더 담으려 하셨으나 너무 무거워질 것 같아 내가 만류했다. 후한 인심에 감사하다.


늦어도 세 시부터는 문경새재를 넘어야 한다고 마음먹은 터라 주변의 온갖 편의시설과 산해진미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몹시 허기지고 지쳤지만 어쩔 수 없다. 언젠가는 꼭, 일부러 이 곳에 와서 식사를 하고 여유를 만끽하리라 다짐한다.



그 길의 어딘가, 개의 이름을 따서 만든 카페 앞에는 녀석이 능숙하게 볼일을 보고 있었다.



드디어 문경새재 길로 접어든다. 3시 직전이니까 계획대로 온 셈이다.



문경새재길은 세 개의 관문이 길목을 지킨다. 첫 번째로 만나는 관문이 '주흘관'이다. 새재(조령)가 있는 산이 바로 주흘산이다.



주흘관의 뒷면에는 '영남제일관'이라 쓰인 현판이 붙어 있다. 대구에도 '영남제일관'이 있고 김천에는 '영남제일문'이 있으나, '영남(嶺南)'이라는 말이 '조령의 남쪽'이라는 뜻이니 이곳 주흘관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영남제일관'이라 할 만하다.



주흘관을 지나면 왼쪽으로 KBS의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있다. 문경새재를 찾는 관광객 대부분은 이곳을 향한다.


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문경새재를 넘어야 하는 나로서는 먼발치로 지날 수밖에 없었다.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는 6.5km로 대략 두 시간 반 소요 예정이다. 다섯 시 반이면 해가 지는데 세시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다른 곳으로 빠질 여유가 없다. 다음에는 꼭 세트장을 둘러본 후에, 아래의 식당과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리라, 다시 한번 다짐한다.



급해도 휴식은 필요하다. 무엇보다 사과를 맛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정자에 가방을 풀고, 계곡으로 내려가 사과를 씻어 한 입 베어 문다. 아삭하고 달콤한 사과 덕에 한결 기운이 난다.



길 오른편에 '조령원터'가 보인다. 원(院)은 공무차 오가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국립 숙박업소다. (민간인들은 주막을 이용했다.) 조선 초기까지는 민관의 구별이 엄격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민간인들도 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에 의하면 이곳 조령원터는 신라 중엽 또는 고려 초부터 있었다고 하니, 문경새재길은 아주 옛날부터 한반도 교통의 요지였음에 틀림없다.


조령원터 석벽의 사진이다. 막 쌓은 듯하나 군데군데 돌을 다듬어 맞춤하게 쌓은 모습도 보인다.


문경새재길이야말로 영남대로 전 구간 중에서 역사성과 장소성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새재길을 걷다 보면 역사적 상상과 상념에 젖어든다. 바로 이 길을 따라 청운의 꿈을 품은 선비들이 과거길에 올랐고, 조선 통신사 행렬이 오갔으며, 임진왜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군 선봉대를 이끌고 지나갔다.


현재 문경새재길은 왼쪽 사진처럼 잘 정비가 되어 있으나, 본래 길의 모습은 오른쪽 사진과 같다. 아직 남아 있는 옛 길의 자취다.


조령원터에서 조금 더 위로 오르면 '교귀정'이 나타난다. 거북이 모양의 관인을 교환한다는 뜻으로, 서울에서 부임해 오는 신임 경상감사와 떠나는 경상감사가 인수인계식을 열었던 곳이다. 1896년 의병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9년에 복원했다고 전한다.


운치 있다. 지금 같으면 각자의 이임식과 취임식이 있을 뿐, 함께 바통터치를 하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도장을 건네는 순간까지, 그리고 도장을 받는 순간부터 직책을 이어가는 관리들의 인수인계식은 맡은 바 직무를 한 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뜻으로 보인다.



문경새재길의 진정한 재미는 이처럼 곳곳에 서린 이야기들이다. 괴물 '꾸구리'가 들썩였다는 바위, 문경의 옛 지명이 문희(聞喜 :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였기에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다른 길을 제쳐두고 굳이 이 길로 한양을 향했다는 이야기, 소원을 비는 돌무지 등에는 조상들의 해학과 소박함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므로 옛길이 사라진다는 건 단순히 하나의 이동 통로가 사라진다는 게 아니라 소중한 조상의 지혜와 유산들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딱딱하고 메마른 아스팔트 아래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역사들이 묻혀버렸을 것인가.



새재길 또 하나의 명물은 '산불됴심비'다. '조심'을 '됴심'으로 표기한 것에 비추어 구개음화가 진행되기 전인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고 추측된다. ('됴심'은 구개음화를 거쳐 '죠심'으로, 다시 단모음화를 거쳐 '조심'으로 변했다.)


산불됴심비를 보고 있노라면 미소가 번진다. 공들여 한자한자 새겼을 터인데 글자의 크기와 위치에 조금씩 변칙을 둔 것이나, '심'자의 받침을 굳이 바깥으로 틀어 낸 익살이 유쾌하다.



이제 두 번째 관문, 조곡관이다. 문경새재의 세 관문 중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신충원이 성벽을 쌓은 게 시초였고 당시에는 '관'이 아니라 '문'으로 불렀다. 숙종 때 '조동문'으로 보수되었다가 구한말에 소실된 후 1970년대에 복원하면서 '관'을 세워 '조곡관'이라 칭했다. 그래서 조곡관은 '조동문'으로도 부른다.



조곡관을 지나자 인적이 거의 끊겼다. 입구에서 여기까지 한 시간 거리다. 팔을 위아래로 힘차게 저으며 걷던 아주머니 두 분도 조곡관에서 유턴해 내려갔다. 여기부터는 길의 경사도 점점 심해진다.


길 한편에 흉하게 상처를 입은 소나무들이 서 있다. 설명에 따르면 일제시대 말에 연료로 쓸 송진 채취를 위해서 이렇게 생채기를 내었다고 한다.


굳이 역사적 비극과 연결짓지 않더라도, 상처 입은 소나무를 보며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건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가끔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식물에게 물어보지 않은 이상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사가 점점 급해지더니 드디어 저 앞에 제3관문이 보인다. 다섯 시를 갓 넘겼다. 예상보다 30분 정도 일찍, 부지런히도 올라왔다.



조령 제3관문의 이름은 '조령관'이다. 정확히 길의 정상에 위치한다.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으니 당연하다. 행정상으로는 조령관 남쪽이 경상북도 문경, 북쪽은 충청북도 괴산이다. 현재의 관문은 1907년에 훼손되었다가 1970년대에 다시 세워졌다.


조령관은 1, 2관문과 달리 '영남제삼관문' 현판이 먼저 보인다. '조령관' 현판은 반대편인 북쪽으로 내어 달렸다. 조령관은 선조 때 북방의 침략을 대비하여 만든 것이니, 조령관의 정면은 북쪽인 것이다.



조령관을 넘는다. 부산에서 출발한지 열흘만에 영남지방을 벗어나는 순간이다.



조령관 근처에는 이곳이 과거시험을 보러 오가던 길임을 알리는 석상과 도적 임꺽정의 현상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제 오늘의 숙소인 조령산 자연휴양림으로 향한다.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중에 해가 졌다. 조용한 솔숲을 걸어 내려가는 동안 흙바닥과 솔잎의 느낌이 포근하다.



조령산 자연휴양림 안에 숙박 시설이 있다는 건 어제 검색으로 알았다. 가족단위로 머물기 좋은 독채, 단체 숙박이 가능한 복합휴양관 등이 있다. 주말에는 방을 잡기 어렵지만 내가 찾은 이 날은 숙박객이 거의 없어 여유로웠다.


안내소 직원들은 친절하게 나를 맞아 주셨다. 아저씨 한 분이 사탕을 건네신다. 간단히 위치 안내를 받고 방으로 올라갔다. 복합휴양관의 2층 방이다. 이날은 건물 전체에 나를 포함해 두 팀이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출발할 때 찍은 조령산 복합휴양관의 모습이다.


방은 기대했던 것보다 크고 깨끗하다. 바닥의 담요가 온돌의 훈기를 잡아두고 있었다.



건물 바로 앞에 매점이 있어 라면과 김치 등 먹거리를 사 갖고 들어왔다. 오늘 저녁은 왠지 라면이 끌린다. 라면 두 개에 삶은 계란을 넣고 김치를 곁들여 한상 차리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방의 침구는 4인 기준으로 갖춰져 있다. 혹시 밤에 추워질까 이불을 다 꺼내어 바닥에 깔고, 혼자서 파자마파티를 하듯 텔레비전을 보면서 여유를 부린다. 아직 이른 저녁이지만 깊은 산골, 달리 갈 곳도 할 일도 없다.


오늘 대략 33km를 걸었다. 맘 편히 쉴 자격이 있다. 무엇보다 문경새재를 넘었다는 심리적 안도감이 크다. 중간중간 참고했던 국제신문의 연재기사 '영남대로가 깨어난다'의 한 구절, "새재를 넘었으니 굴러가도 한양을 못 갈까 싶다"는 문구를 거듭 읽는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날 이후 전체 일정을 마칠 때까지 6일이 더 걸렸다. 굴러서 가기엔 무리다. 안도감의 실체는 서울이 가깝다기보단 일정이 '꺾였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영남대로의 최고 피크가 조령이라, 앞으로는 주로 내리막일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삼삼한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9일차 : 상주터미널 인근에서 점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