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心神] 자신을 용서하기, 자신과 화해하기

by 김정환


용서도 좋고 화해도 좋다. 그런데 나 자신과는 그게 잘 안 된다. 두고두고 이불킥이요, 심하면 우울증에 빠진다. 남들에게 옹졸한 편은 아닌데 왜 나 자신은 용서가 안 될까? 자신과 화해하고 편안해 질 수는 없을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 구조를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했다. 우선 '쾌락 원리'로 움직이는 원초아(id)가 있다. 먹고싶을 때 먹고 싸고싶을 때 싸며 자기가 원하는 건 즉각 충족시켜야 하는, 말 그대로 원초적인 심리다. 생떼 쓰는 아이같지만 원초아 덕분에 인간은 목숨도 부지하고 번식도 할 수 있다. 반대편에는 '도덕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초자아(super ego)가 있다. '잘했어 잘못했어', '너 이래야되겠어 저래야되겠어'처럼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마음이다. 원초아를 마냥 내버려두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될 것이므로, 초자아는 인간을 사회 구성원으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 이들 원초아와 초자아를 중재하고 조율하는 것이 자아(ego)다. 자아는 '현실 원리'에 따라 원초아의 욕망과 초자아의 통제 사이에서 타협점을 마련하고 적당한 수준으로 생존을 모색한다.


여기서 자칫 범하기 쉬운 오해가 원초아를 악으로, 초자아를 선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들은 인간의 다양한 심리적 양상일 뿐 서로 우열의 관계에 있지 않다. 초자아의 개념은 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초자아가 '도덕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 초자아가 곧 '도덕적'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초자아의 형성에는 주 양육자(부모 등)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따뜻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어디서 어린 놈이 말대꾸를 하고 있어!'라는 폭언도 아이에게는 초자아의 재료가 된다. 나아가 실업자 삼촌이 무심코 던진 말, 선생님의 편향된 주장, 교회에서 들은 목사님의 '쎈' 설교도 초자아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내 생각의 필터가 형성되기도 전, 연하고 말랑하며 무방비였던 나의 마음으로 파고 들어온 말과 관념들이다.


그렇게 형성된 초자아가 나를 다그칠 때, 나 자신은 한없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초자아는 나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나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자아가 언성을 높이면 숨을 곳이 없다. 나에 대한 용서, 나와의 화해가 어려운 이유다. 차라리 다른 사람과 다투었다면 '그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하며 용서와 화해할 여지가 있을 터인데, 초자아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변명이 통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물론 초자아는 내가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일종의 자가면역질환처럼, 그로 인해 내 스스로가 힘들고 괴로울 지경이 된다면 문제가 있다. 가뜩이나 세상살이도 힘든데 내 안에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어야 한다니 더 지치고 힘이 든다. 그렇다면 자신과의 화해와 용서를 방해하는 '초자아의 폭거'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첫째는 '자아 전략'이다(물론 내가 붙인 이름이다). 자아는 현실 원리에 기반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상황을 탐색한다. 그러므로 자아는 나를 다그치는 초자아가 정말 절대 권위를 지녔는지 의심해 볼 만한 힘이 있다. 나를 지배하는 초자아의 지시가 과연 모두 진리일까? 혹시 세상을 필터링할 만한 식견도 없을 때 내게 파고든 관념의 파편들에 내가 제압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위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못이겨 스스로 성기를 절단한 남성이 있었다. 어쩌면 그의 초자아는 '자위는 죄'라 언성을 높이던 누군가의 산물일 수 있다. '모든 동물은 성행위 후에 우울해진다(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는 라틴어 격언처럼 다소의 헛헛함쯤 있을 수도 있겠으나, 자기의 신체까지 훼손하는 초자아의 기원이 어릴적 들었던 누군가의 사견이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또 하나는 '초초자아 전략'이다(마찬가지로 나의 개념이다). 아예 자신의 초자아를 넘어서는 '초초자아'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그것은 종교적 경험이다. 예를 들어 크리스트교는 신의 온전한 사랑을 가르친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착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의 사랑을 깊이 느낀다면 자신의 '사소한' 초자아가 빚어내는 지나친 죄책감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는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공동번역 개정판, 마르코복음 3장 28-29)"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는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신(성령)에 대한 거부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크리스트교의 관점에서는 '나는 용서받지 못할 거야'라는 태도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된다. 사랑과 용서의 신을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또 다른 단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나아가 신과의 화해를 위한 종교적 해석이다.


만약 불교적으로 접근한다면 자신의 초자아를 넘어서는 궁극의 지혜, 즉 '마하반야'를 따를 때 인간은 초자아의 폭거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다. 세상에 고정된 바란 없으며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이치를 깨달으면 스스로를 구속하는 자신의 초자아 또한 자신이 집착하고 있던 하나의 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감옥이 사라지면, 죄수도 사라진다.


물론 이러한 논의가 세상의 도덕과 사회적 규율에 대한 거부를 말하는 건 아니다. '자아 전략'과 '초초자아 전략'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과 화해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어쩌면 세상에서 통용되는 도덕보다도 더 엄격하게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을 위한 공감이자 고민의 산물이다. 인생은 수많은 사건의 연속이다. 애초에 마냥 좋거나 무해한 사건들로만 채워질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자루 아니던가. 그러니 이미 벌어진 일, 지울 수 없다면 품을 수는 있기를. 이겨낼 수 없어도 견뎌낼 수는 있기를.




keyword
작가의 이전글[私說] 현 탄핵정국의 가장 큰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