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1) : 간판

삶의 치열함 속에 드러나는 재치와 해학

by 김정환

천천히 걷다 보면 눈에 띄는 것도 많다. 그중 간판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간판에는 치열하게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현재와 과거, 때론 재치와 해학이 슬몃 드러난다.


양산에 있는 아동복 전문점은, 그 제목만으로는 아동복과의 유사성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인데, 아이들은 '방구'나 '똥'류에 사족을 못 쓰기 때문이다.



밀양의 수학 교습소다. '단디'는 경상도 사투리로 '단단히'의 준말이다. '야무지게', '신경 써서'라는 뜻이다. "날 추븐데(추운데) 옷 단디 입어라", "문단속 단디 해라"처럼 쓰인다.


수학은 중고등학교 학력평가에서 항상 최하위를 차지하는 과목이다. 그런 수학을 '단디' 잡아 준다면 학부모의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대구의 뒷골목이다. 만약 '탈모관리'라는 글자를 보지 못했다면 그냥 스쳐갔을지도 모른다. 의미를 알고 간판을 보자 무릎을 쳤다.


아닌게 아니라 남성의 외모 고민 1위가 탈모다. (물론 남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전이 주된 원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방에서는 머리의 '열'을 낮춤으로써 탈모를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방법을 쓰든, 탈모로 고민 많은 분들이 '모난 사람'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대구 끝자락에서 만난 이 간판이 무엇을 패러디했는지는 쉽게 파악된다. 사실 민비(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의 칼을 맞기 전에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쳤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각색이다.



민비는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는 '대한제국'의 황후다. '민비'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측은 무능하고 허울뿐이었던 제국에 냉정하다.


결국 '민비'냐 '명성황후냐'는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에 달려 있으나, 아무튼 이 식당의 쇠고기는 '조선'이든 '한국'이든 이 땅에서 자란 한우라고 믿고 싶다.


이번에는 구미에서 선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본 중국집 간판이다. '00각', '**원'과 함께 중국집 이름으로 자주 쓰이는 '~루'의 라임을 살려, 음식에 대한 주인장의 자부심을 기가 막히게 담았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느낌의 간판을 신림동에서 본 적이 있다. 서울대 정문에서 신림역으로 내려가는 길에 '차이나'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평범한 듯하지만 '차이나' 앞에 슬쩍 '맛'자를 덧붙인 재치에 감탄하였다. 이 곳의 간판도 그에 못지않다.




지금은 서울에서 '학생사'라는 간판을 거의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이런 상점이 학교 주변에 한두 개씩 꼭 있었다. 문구는 물론 교련복, 체육복, 체육 기구, 각종 준비물, 참고서 등을 팔던 일종의 원스탑 서비스였다.


가창의 학생사

서울에서 보기 힘들어진 것처럼 지방의 학생사도 활기를 잃었다. 경북 가창에서 본 학생사는 야콘 판매까지 겸하고 있다. (야콘은 다이어트에 좋은 뿌리채소다.) 함창의 학생사에서는 낚시 용품도 구입할 수 있다. 물론 학생이 릴이나 찌를 살 일은 없다.


함창의 학생사


추측컨대 학령 인구 감소가 학생사 쇠락의 결정적 요인일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생이 다른 나이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이 모두 '학생사'에서 팔던 감광지에 단추를 올리거나 훌라후프를 돌리고 교련복을 입었다. 한 반에 60명도 모자라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학교에 다닐 때다. 그랬던 '학생' 자체가 줄어들었으니 '학생사'가 기우는 것도 석양같은 필연이다.




학생사가 원스탑 서비스였다는 말에 떠오르는 상점이 하나 더 있다. 시인의 마을인 내호리(4일차)의 '유천 휴게실'이다.


골목길 하나에 정미소와 미용실, 식당이 모두 끼어 앉은 자그마한 마을에서 이 가게는 담배가게(담배), 커피숍(커피), 치킨집(통닭), 한식당(닭볶음)을 포괄한다. 게다가 '애터미'는 다단계 생활용품 브랜드이니, 이곳은 가히 내호리의 허브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유흥업소 간판이다. 모든 유흥업소 간판의 공통 주제는 '술+여자+노래'다. 취객을 유혹할 현란한 조명도 필수다. 지역에 따라 '미시'를 강조하거나 '노래'에 초점을 두는 식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간판의 다양성은 문화의 다양성과 같다. 유흥업소의 간판이 저마다 형형색색이지만, 결국 '여자와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러 오라'고 손짓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대도시에는 술집의 유형 자체도 다양하거니와 당구, 볼링같은 레저시설, 영화, 연극 관람의 기회도 널려 있다. 지방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기회들이다.


이렇다 할 여가의 기회가 없는 지방 소도시에서 대부분 50대 이상 중‧노년인 지역 주민이 즐길 만한 여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 지방 유흥가에도 좀 더 다양한 간판들이 들어설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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