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이 되기 전에 지금까지의 삶을 글로 정돈해 봐야지 싶었다. '경험'을 키워드로 써 볼까? 사랑, 직업, 여행, 음식, 종교... 산 날이 짧지 않으니 쓸 꺼리도 제법 되리라.
다만 그냥 '경험'이라니 너무 막연하다. '성공과 실패의 경험'으로 구체화해 본다. 언뜻 떠오르는 것들부터 적어 보았다. 행정고시에 떨어진 것(실패), 국토종주를 해 낸 것(성공), 박사과정에 불합격한 것(실패), 다이어트... 다이어트?
분명 살이 빠진 적도 있었다. 입시철, 한 달 가량 바쁘게 지내고 나면 체중이 꽤 줄어든다. 그런데 이걸 '다이어트 성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다른 기억도 있다. 한번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침식사는 씨리얼과 저지방 우유, 점심에는 사과와 당근, 저녁은 밥 반공기, 이렇게 한 달을 버텨 7킬로그램을 빼 내었다. 이건 '다이어트 성공'의 기억으로 손색 없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니 '성공의 경험'으로 규정할 만한 것이 의외로 많지 않았다. 실패도 그렇다. 이성을 만나기도 하고 헤어져도 봤지만, '관계에 실패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시절 인연에 따라 만나고 헤어졌다면 '관계의 종결'이라 할 수는 있어도 '관계의 실패'라 부르기는 멋쩍다.
이렇게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더듬다, 결국 둘 다 '의식적인 시도'를 전제로 한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의지를 갖고 시작하거나 수행하지 않은 일은, 그 결과가 아무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 해도 '성공' 또는 '실패'의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자 내 인생에서 성공 혹은 실패의 경험으로 적을 만한 것이 확 줄어들고 말았다. 어느 쪽도 손가락 열 개를 넘지 않았다. 무려 반 세기 가까운 세월을 살았는데도!
삶에서 실패와 성공으로 꼽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 그것은 삶을 의도적으로 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저 치약은 왼손으로, 바지는 오른발부터, 인생의 대부분이 그처럼 무의식과 습관으로 흘러왔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수록 회한만 깊어가더니, 이루거나 쌓은 게 없어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