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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Feb 01. 2022

[나의 실패] 행정고시 낙방썰


 45세 아버지와 36세 어머니의 늦둥이로 태어났으면 사회생활이라도 빨라야 했건만, 스무 살에 들어간 대학을 그만 두고 전공을 바꿔 스물 여섯에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그나마도 신통치 않았다. 정치학에 매료되어 시작한 새출발이었으나, 생각보다 학문으로서의 정치는 재미가 없었고 현실 정치에는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전공까지 바꾼 마당에 사기업에 취직하기는 싫었다.


 결국 30살이 되던 2003년, 대학원에 진학했다. 애초 학문에 뜻을 둔 것이 아니어서 첫 학기 내내 고민에 시달렸다. 그러다 외무고시에 눈길이 갔다. 고시는, 성공만 한다면, 비교적 빠른 시간에 괜찮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길이었다. 외무고시를 위해 대학원 전공도 국제정치학으로 잡았다.


 당시에는 외무/행정고시에 나이 제한이 있었는데 외무고시의 제한이 만 30세로 빨랐다. 다만 군 복무 기간만큼 연장이 되어, 내 경우 공익근무요원으로 지낸 18개월을 더하면 만 31세 6개월까지 응시가 가능했다. 우리나이로 32살이 되는 2005년까지였다.


 정말 고시에 뜻을 두었다면 그 즉시 준비를 했어야 다. 하지만 헛된 자존심에 그러지도 못한 것이 실패의 서곡이었다. 고시를 준비한다는 게 뭔가 좀스럽고 타협적인 것 같았다. 늦둥이에 늦깎이를 감수하고 시작한 전공인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 고시로 귀결된다는 게 아깝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물쭈물 대학원 생활을 이어 가다 결국 31살이 된 2004년, 그마저도 1학기까지 마친 후에야 휴학을 했다. 외무고시로는 처음이자 마지막 도전이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2004년부터 1차시험이 공직적격성테스트(PSAT)로 바뀌어 부담이 다소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1년도 안되는 기간에 국제정치학, 국제법, 국제경제학, 영어, 제2외국어까지 2차시험 다섯 과목을 준비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패기가 넘쳤다. 진심으로 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2005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응시한 외무고시에서 보기좋게 떨어지고 말았는데, 1차시험에서 불합격했다는 게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그래도 패기가 남았다. 외무고시에 비해 나이 제한에 여유가 있던 (그러다 결국은 나이 제한이 없어진) 행정고시로 방향을 틀었다. 일단 고시의 세계로 뛰어는 들었고,  시도는 실패했지만 멈추기는 아쉬웠고, 성공만 한다면 외교관과 비슷한 효용을 누릴 수 있는 기회로 자연스레 흘러든 것이다. 무엇보다, '빠른 성공'에 대한 기대를 걸어보기에 고시는 여전히 유혹적이었다.

 

 행정고시 일반행정직렬의 2차시험 과목은 정치학, 경제학, 행정법, 행정학, 선택 1과목이었다. 행정법이나 행정학은 완전히 생소한 영역이었다. 마음이 급해 남들 따라 학원부터 다녔다. 사실상 행정고시는 처음이었음에도 여전히 '내년에 붙어버리겠다'는 식의 마음을 먹었던 걸 보면 외무고시 실패에서 배운 게 하나도 없었다.


 2006년 치른 첫 행정고시에서 또 1차떨어지고 말았다. 애써 준비한 행정법도 행정학도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허탈한 마음에 우선은 남은 한 학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대학원에 복학했다. 졸업 후 학원 강사일을 병행하면서 이런저런 시도와 방황의 길을 떠났다.


 그러다 다시 고시계로 돌아와 행정고시 1차시험에 합격한 것이 2009년이었다. 그 때 내 나이 벌써 36살이었다. '고시 낭인'이라는 말은 여러 해 고시에 매달린 사람들 얘기지 나한테 해당되는 말은 아니라고 애써 선을 그었지만, 객관적으로 이미 나는 고시 낭인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태어나기도, 대학도 늦더니 '낭인의 길'마저 굳이 그랬다.   


 1차시험 합격 후 신림동 고시촌에 원룸을 잡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갔다. 그간 고시 준비를 계속 해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해 6월에 치르는 2차시험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응시하기로 했다. 본 게임으로는 이듬해인 2010년을 노렸다. 분당까지 오가던 주말의 학원 강사 생활도 그대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는 안 되었다. 설령 준비가 부족해도 당해에 붙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악착같이 달려들었어야 다음 해도 노려볼 만하게 되는 법인데, 느슨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버렸다.


 신림동 고시촌은 저렴한 가격에 모든 것을 누리기 좋았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당시만 해도 식당과 술집은 기본이요 만화책과 DVD 대여는 물론 야구장과 피트니스까지, 그 작은 동네에 없는 것이 없었다. 미래를 저당잡은 풍요를 다양하고 건강하게 즐길 수 있었다. 요즘도 가끔 그 때가 그립다는 건, 당시를 내가 얼마나 수험생스럽지 않게 보냈는지 말해주는 한 증거다.  


 게다가 연중 돌아가는 고시 학원 사이클을 그냥 쫓아 간 것도 전략상 실수였다. 기본이 부족해 매번 수업 내용을 절반도 복습하지 못하고 허덕였다. 만약 이듬해(2010년) 합격을 목표로 했다면 2009년 봄에는 그해 여름의 2차시험 대비 강의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기본부터 챙기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기본도 없는 상태에서 2차 준비를 하려니 힘에 부쳤고, 그렇게 2009년 상반기는 이도 저도 아닌 채 흘러갔다. 예상대로 2009년 행정고시 2차는 소박한 점수들로 끝났다.


 그렇게 고시촌에서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2010년 합격을 노리고 학원 수업을 계속 따라갔다. 하지만 착실하게 준비가 되고 있다는 충실감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략상 실수가 아니라 성실도의 문제였다. 보통 학원 수업은 밤 10시경 끝났는데, 건물을 나오는 순간의 해방감에 여러가지 이유를 만들어 내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 컨디션이 안 좋아, 오랜만에 친구가... 이런 식으로 밤시간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다 보니 다음 날까지도 공부 일정은 들쭉날쭉이었다.


 열정이 식은 건 아니었다. 합격과 성공의 욕구도 여전했다. 다만 결심과 다짐을 일상의 동력으로 전환하는 시스템이 취약했다. 고시를 원자력 발전소에 비유하면 열정은 핵에너지, 실력 향상은 전기 생산으로 볼 수 있다. 핵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이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면 그저 폭탄일 뿐이다.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핵에너지가 터빈을 돌릴 수 있게끔 체계적인 장치들이 필요하다. 나는 그러한 루틴을 구축하지 못했고, 다짐만 거듭하는 동안에 시간과 에너지는 꾸준히 새어 나갔다.    


 고시가 위험한 건 행위의 결과가 상당한 시차를 두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성실한 고시생활을 하면서도 이듬해인 2010년 초 1차시험에 통과했고, 장마가 시작되던 6월 말 닷새동안 성균관대에서 2차시험을 보았다. 2차시험의 합격자 발표는 10월이었다. 아주 잘 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희망을 즐길 서너 달 유예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정직하게 회상해 보면 당시에도 잘 안 될 줄 알았다. 고시촌 방을 빼지 않았던 것이 그 증거다. 이미 다음 해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영어회화 스터디를 나다니고, 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부모님께 언뜻언뜻 희망을 비쳐드리기도 했지만 나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딱한 일이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 불합격을 예상했다면, 그리고 한 해 정도는 더 할 수 있겠다는 내면의 소리를 감지했다면, 그 때부터라도 예비합격생 노릇을 할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학원으로, 독서실로 파고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어쩌면 붙을 지도 몰라'하는 아주 약한 기대로 자신과 주변을 속이며, 불안하지만 당장은 웃고 떠들면서 지냈던 여름과 가을이었다.  


 대가는 참혹했다. 합격선 근처에도 못 간 점수로 2차시험에 떨어졌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부모님 앞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그 때 내 나이가 서른 일곱이었다. 결혼도, 취업도 하지 못한 서른 일곱 떠꺼머리 아들을 위로하던 부모님의 모습은 아주 작은 새 같았다불성실과 자기 기만의 대가가 내게만 머물지 않는 것이 죄스러웠다.


 결국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지만 이듬해인 2011년, 1차시험에 합격 후 2차시험을 준비하는 중에 어머니의 암이 발견되었다. 4개월 시한부 판정을 믿을 수 없어 어머니 차트를 들고 여기저기 병원을 뛰어 다녔다. 시험은 접었다. 시험장에도 가지 않으려던 나에게 누나는 '그러면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냐'고 했다. 닷새동안 성균관대를 오르내리며 꾸역꾸역 시험을 보았다. 마지막 날 시험을 끝내고 나오니 친구가 나를 태워주려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행정고시 도전은 내 인생에서 '실패'의 바구니에 담겼다. 의미가 없던 건 아니다. 재능과 자신감을 뽐냈던 젊음의 한 시기를 아픈 교훈과 바꿨다. 재능보다는 절실함이, 자신감보다는 성실함이 훨씬 중요했다. 빨리 가려면 돌아 갈 수도 있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백세시대라 하지 않던가. 아직은 할 수 있는 시간이 짧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적지 않다. 고시에서 배운 걸 잊지만 않는다면 남은 인생에서 아주, 아주 늦둥이까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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