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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Feb 12. 2022

[노래공감] 황규영, <나는 문제없어>


 90년대 사교육의 중심은 노량진이었다. 현재 올리브영이 있는 공단기/경단기 학원 건물에 호랑이 얼굴을 그려 넣은 정진학원이 있었다. 길을 건너면 좁다란 골목이 쭉 이어졌는데 그 끝에 단과 중심의 한샘학원(지금은 고려직업전문학교)과 종합반 제일학원이 있었다.


 정진학원에서 한샘학원까지의 골목을 흔히 '재수골'이라 했다. 재수골에는 재/N수생의 심신을 달래줄 식당, 만화방, 오락실이 빼곡했다. 중간중간에 핫도그를 파는 곳들이 있었는데, 재수골의 핫도그는 씨알이 굵어 하나만 먹어도 든든했다. 설탕을 잔뜩 버무려 케첩과 머스타드 소스를 흘러 내리도록 얹었다. 애칭으로 '둘둘이'라 불렸다.


 거리에 재수골이 있었다면 노래에도 재수송이 있었다. 그놈의 대학이 뭐라고, 이놈의 사회는 대학에 떨어졌다는 이유로 가장 활기 넘칠 스무 살 언저리의 날개를 우두둑 우두둑 꺾었다. <나는 문제없어>는 졸지에 문제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 재수(또는 N수)생들에게 실존을 회복하라고 외친다. 이 세상 위엔 내가 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님을 환기시킨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직시하게 한다. 나의 길을 가고 싶다!   


 지금에야 그 거창한 '실존'과 '연대'와 '성찰'이 고작 다음 해 대학입시 합격을 향하고 있다는 게 우스워보이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 우습지 않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세월이 지나기 전에 우스운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평균수명을 80세라 하면 제1쿼터부터 패배감을 맛본 청춘들이다. 그들에게 반주도 없이 터지는 황규영의 육성은 '청춘이여, 어깨를 펴라'는 응원의 목소리였다.  


 단지 응원만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각인되지는 않았으리라. 가사 하나하나에 당시의 일상이 스몄다. "짧은 하루에 몇 번 씩 같은 자리를 맴돌다" - 오전에는 정진학원 오후에는 한샘학원, 하루에도 재수골을 몇 번씩 맴돌았지... "그렇게 돌아보지 마 여기서 끝낼 수는 없잖아" -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뛰어 든 재수의 길이었다. 복학의 유혹이여 물러가거라! "나에겐 가고 싶은 길이 있어" - 결국 지금은 다른 길로 가고 있지만 진지하게 정치인의 꿈을 꾸었던 청운의 내가 거기 있었다.


 게다가 "너무 힘들고 외로워도 그건 연습일 뿐야"라니, 그때도 지금도 정말 맞는 말 아닌가. 그 때는 재수가 제일 힘든 것 같았지만, 재수 이후는 모든 순간이 재수보다 한 칸씩 힘들어지는 실전의 연속이었다.


 격려와 응원이 필요한 게 재수생 뿐일까.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도 날개는 꺾이고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는다. 달라진 것도 있다. 둘둘이는 혈당때문에 못 먹고, 날개 아닌 관절이 우두둑거린다. 그래도 노래의 마지막, "넘어지진 않을거야"에 여전히 가슴이 뛴다. 다만 세월이 준 겸손이랄까, 한 글자는 넣어야 할 것 같다. "나는 '별' 문제없어!"



황규영, <나는 문제없어>

https://youtu.be/ex9EtlDk5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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