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슴푸레 May 06. 2023

이런, 또 열심히 하고 말았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3월, 편찬실 출근을 앞두고 새벽부터 탈이 났다. 엄연히 학교임에도 몸속 직장인 세포가 곳곳에서 과도하게 꿈틀거렸다. 대학원생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몇 번씩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배를 쓸었다. <연세 현대>의 사전 체계와 편찬 시스템을 채 익히기도 전에 점심 먹은 직후, 바로 사전 원고 교열을 시작했다. 그렇게 첫 단추를 끼우고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사이 학교엔 차례로 봄꽃이 피었다. 해사한 목련과 수줍은 벚꽃, 화려한 연산홍이 주를 달리해서 피고 또 피었다. 혼자 밥을 먹으러 학생 식당에 내려갈 때마다 스무 살 남짓의 학부생 무리를 만났다. 섞이지 않는 기름처럼 둥둥. 어느 날부턴가 출근과 동시에 청경관에서 김밥과 커피를 사 들고 올라왔다. 연구실에 앉아 김밥을 먹으며 사전 원고를 보는 날이 이어졌다. 긴밀했던 그곳이 가끔 생각났다. 그렇지 못한 이곳의 공기는 세련되게 자유로웠다.


  주가 지날수록, 달이 지날수록 확실해졌다.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더 빨리 나왔어야 했다는 사실, 이제라도 그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사실. 직장과는 다른 안정감에 '여긴 안전해.' 다섯 음절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그러는 동안 하나를 깨면 세 개의 일이 자잘자잘하게 몰려들었다. 언제 시작될지 몰라 초조했던 프로젝트가 예고도 없이 라인업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정신줄 놓고 노랠 불렀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아흑).


  매일매일 힘 빼는 연습을 하고, 모든 일에 전력을 다하지 말자 다짐하지만 일하는 중간중간 화들짝 놀라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하루의 끝에 드는 생각은


이런, 또 열심히 하고 말았다(털썩).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게 좋은 거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