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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Nov 22. 2023

동네에서 전 팀장님을 마주쳤다

  아차! 작은아이 데리러 갈 시간이 된지도 모르고 교열 원고를 보고 있었다. 마스크를 고 베이지색 긴 카디건을 꿰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나올 때가 지났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아 휴대폰을 열고 쓴 글을 고치고 있었다. 등 뒤로 누군가 지나치는 기척이 느껴져 돌아봤다. 뒷모습이 익숙했다. 혹시 팀장님? 근무 시간인데 그럴 리가. 몸을 돌려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이윽고 작은애가 나왔다. 과외 가방을 바꿔 들고, 겉옷을 여며 주고 돌아섰는데. ! 정말 팀장님이 내 앞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인사해, 팀장님이셔. 예전에 뵀었는데 기억 안 나?"

  작은애에게 인사를 시키며 말했다.


  "박 선생 여기 살아?"

  "아. 아니요. 아이가 여기서 수학 과외를 해서요."

  "공부방이 여깄어?"

  "네. 2층에요."

  "잘 지내지? 별일 없고?'

  "네. 덕분에요. 잘 지내시죠?"

  "응. 그럼 또 봐."

  "안녕히 계세요. 가자, 딸."


  전 직장이 집과 5분 거리기는 했어도 이렇게 코앞에서 그것도 팀장님을 뵐 줄은 몰랐다. 반갑기도 했다가 당황스럽기도 했다가. 여러 감정이 밀려왔다. 뒷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했을 때 "팀장님!" 하고 불렀어야 했나 싶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오늘 내 복장은, 사무실에서 늘 걸치던 카디건 차림이었다. 그래서 날 알아보셨을까.


  퇴사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하원하는 아이를 마중하기 위해 메아리 공원을 지나칠 때마다, 장을 보러 가기 위해 주민 센터 앞 사거리를 건널 때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뛸 때마다 최대한 원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밤이면 멀리서도 빛을 발하는 태극 문양과 '국립국어원' 파란 글씨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 해 놓고, 아직 정리되지 못한 마음 때문에 복잡하고 심란한 기분이랄까. 원을 나오고 여러 번 회사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여전히 회의를 하고 있었고, 전전 팀장님께 혼나고 있었고, 심의회 자료 준비로 쫓기고 있었다. 악몽이라 할 순 없지만 꾸고 나면 개운치가 않았다. 그만큼 내게 19년이란 세월을 보낸 그곳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그저 돈만 번 '전 직장'이 아니었다. 고맙고, 좋았고, 아팠던 곳.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가끔 그립기도 한. 하, 그야말로 헤어진 '전 남친'을 보는 기분이 드는 곳.


  퇴사 전 팀장님께 면담 신청을 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날 내게 해 주셨던 당부의 말들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킨 게 없어 민망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나왔고 정말 어떻게 어떻게 시간이 흘러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그런 날.


  1년 사이에 학위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고.
어떻게. 이사라도 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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