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 작은아이 데리러갈 시간이 된지도 모르고 교열 원고를 보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베이지색 긴 카디건을 꿰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나올 때가 지났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아 휴대폰을 열고 쓴 글을 고치고 있었다. 등 뒤로 누군가 지나치는 기척이 느껴져 돌아봤다. 뒷모습이 익숙했다. 혹시 팀장님? 근무 시간인데 그럴 리가. 몸을 돌려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이윽고 작은애가 나왔다. 과외 가방을 바꿔 들고, 겉옷을 여며 주고 돌아섰는데. 앗! 정말 팀장님이 내 앞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인사해, 팀장님이셔. 예전에 뵀었는데 기억 안 나?"
작은애에게 인사를 시키며 말했다.
"박 선생 여기 살아?"
"아. 아니요. 아이가 여기서 수학 과외를 해서요."
"공부방이 여깄어?"
"네. 2층에요."
"잘 지내지? 별일 없고?'
"네. 덕분에요. 잘 지내시죠?"
"응. 그럼 또 봐."
"안녕히 계세요. 가자, 딸."
전 직장이 집과 5분 거리기는 했어도 이렇게 코앞에서 그것도 팀장님을 뵐 줄은 몰랐다. 반갑기도 했다가 당황스럽기도 했다가. 여러 감정이 밀려왔다. 뒷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했을 때 "팀장님!" 하고 불렀어야 했나 싶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오늘 내 복장은, 사무실에서 늘 걸치던 카디건 차림이었다. 그래서 날 알아보셨을까.
퇴사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하원하는 아이를 마중하기 위해 메아리 공원을 지나칠 때마다, 장을 보러 가기 위해 주민 센터 앞 사거리를 건널 때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뛸 때마다 최대한 원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밤이면 멀리서도 빛을 발하는 태극 문양과 '국립국어원' 파란 글씨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기가 먼저헤어지자해 놓고, 아직 정리되지 못한 마음 때문에 복잡하고 심란한 기분이랄까. 원을 나오고 여러 번 회사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여전히 회의를 하고 있었고, 전전 팀장님께 혼나고 있었고, 심의회 자료 준비로 쫓기고 있었다. 악몽이라 할 순 없지만 꾸고 나면 개운치가 않았다. 그만큼 내게 19년이란 세월을 보낸 그곳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그저 돈만 번 '전 직장'이 아니었다. 고맙고, 좋았고, 아팠던 곳.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가끔 그립기도 한. 하, 그야말로 헤어진 '전 남친'을 보는 기분이 드는 곳.
퇴사 전 팀장님께 면담 신청을 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날 내게 해 주셨던 당부의 말들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킨 게 없어 민망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나왔고 정말 어떻게 어떻게 시간이 흘러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그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