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오는 아이의 표정이 날아갈 듯하다. 날 보고 세상 예쁘게 웃는다. 무슨 좋은 일이 있길래. 아이는 잠바도 제대로 입지 않고 시험지를 들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엄마. 나 수학 몇 점이게?"
"글쎄. 엄청 잘 봤나 보네? 90점?"
"아니! 이거 봐."
"우와. 진짜 잘했다. 엄마가 이렇게 기쁜데 우리 딸은 얼마나 기쁠까. 엄마는 평생 못 받아 본 수학 100점이라니. 대단하다!"
아이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종알종알. 신나서 떠드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무장 해제가 된다. 나도 모르게 반달눈을 하고 미소를 가득 머금게 된다. 그냥 예쁘다. 예쁘다는 말밖엔 떠오르는 말이 없다.
"엄마. 저번에 못 한 파자마 파티. 나 시험도 잘 봤는데 이번 주말에 우리 집에서 하면 안 될까?"
"......."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한순간 거둬 버리는 아아, 금단의 단어. '파자마 파티.'
"엄마가, 저번에 여행 가기 전에, 파자마 파티 해서 혹시라도 아프면 여행 못 간다고, 오빠 코로나랑 A형 독감 나은 지 얼마 안 돼서 친구들 초대하면 안 된다고, 여행 다녀와서 아무도 안 아프면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
"내가 그랬어? 기억이 안 나는데."
"아 진짜 엄마는!"
"엄마 혼자 결정할 수가 없어. 이따 아빠 퇴근하고 오시면 물어보고."
"그럼 엄마는 된다는 거지?"
"엄마가 된다고 해도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돼. 엄마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그니까 엄마는 된다는 거지?"
"생각해 보고."
과외가 끝나고 방에서 나온 영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머니. OO이 오늘 영어 시험 100점 맞았데요. 알고 계셨어요?"
"아, 아니요. OO아. 왜 아까 얘기 안 했어? 영어도 100점이라고?"
"응. 수학이 너무 세서 수학만 말했지."
"우와. 영수 100점이라고? 엄마도 평생 못 해 본 영수 100점이라고? 잘했다. 잘했어."
"그러니까 피자마 파티? 오케이?"
"흠."
나는 바로 수학 시험지를 사진 찍어 남편에게 전송했다. 나만큼 기뻐하며 남편이 톡을 보냈다.
"잘했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7시 40분에나 수학 과외가 끝나는 큰애 스케줄에 맞춰 분위기 좋은 소규모 레스토랑에 8시로 예약을 했다. 아이들에게도 외식하러 간다고 하고, 과외 시간도 30분 당겨 오붓하고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를 기대하고 있었다.
"아빠. 저 시험도 잘 봤는데, 이번 주말에 친구들 네 명 초대해서 파자마 파티 하면 안 돼요?"
"그때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여행 다녀와서 아무도 안 아프면 엄마가 생각해 본뎄어요."
남편이 난감한 얼굴로 날 보자 바로 깨갱.
"미안. 난 생각이 안 나."
남편은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아이는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러다 남편은 방에 들어가고. 둘이 남은 상황에서 아이는 나를 계속해서 설득했다. 아빠는 엄마 말은 다 들어주지 않느냐며. 엄마가 말 좀 해 보라며.
"흠. 친구 네 명이 집에서 자야 한다고, 아빠랑 오빠가 밖에서 자는 건 좀 말이 되지 않지 않니?"
"할머니 댁에서 자면 되잖아요."
"할아버지, 토요일에 일 나가실지도 모르는데 잘 못 주무셔. 그리고 엄마 한 달 뒤에 길게 출장 가면 너희들도 부탁드려야 하는데 엄마 입장은 생각 안 하니? 아빠랑 오빠 할머니 댁에서 자면 저녁부터 아침까지 신경 쓰셔야 하잖아."
"하. 그럼 호텔 가서 자면 되잖아요!"
"뭐? 너무하는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밤새 논다고 빈대가 드글댈지도 모르는 호텔에서 아빠랑 오빠더러 나가서 자라는 게 말이 돼?"
"엄마는 정말."
"그럼 이렇게 하자.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친구들 오라고 해서 놀아. 엄마 아빠 오빠 다 나가 있을게. 하지만 자는 건 안 돼. 네 명이 쓸 요와 이불도 집에 없고."
"엄마랑 이제 얘기 안 해요."
아이는 안방으로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 밥도 안 먹겠다고, 내일 있을 학교 학예회에도 오지 말라며 성질 성질을 부렸다. 그런 탓에 레스토랑 예약은 취소를 할 수밖에 없었고 과외 끝나고 신나서 돌아온 큰애는 이상해진 집 분위기와 급히 하이라이스를 만드느라 분주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파자마 파티는 안 하기로 한 거야?"
남편이 방에서 나와 조용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작은애는 저녁을 굶었고 방에서 나오지 않다가 잘 때가 돼서야 안아 달라며 팔을 벌렸다. 그리고 성질 부리고 억지 써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잠깐, 아주 잠깐 들어줄걸 그랬나 후회했다. 남편을 설득할걸 그랬나 아주 잠깐 후회했다. 내 품을 파고드는 아이의 동그란 몸에 내가 너무 심했나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
"그냥 친구들이랑 주말에 예스 24 구경 가고 맛있는 거 먹기로 했어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아이는 벌써 이만큼 커 있었다. 방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만큼. 나는 또 한 번 느꼈다. 매순간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를 키우고 있음을.
어제 못 간 레스토랑은 불금에 가는 걸로.
애들 모르게 다시 예약해야지.
서프라~이즈해 줘야지(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