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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Dec 17. 2023

예정에도 없던 미리 크리스마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고 있는데 작은애가 들어왔다.


  "엄마랑 빵 굽고 싶다. 크리스마스도 얼마 안 남았고. 우리 크리스마스 케이크 만들면 안 돼요?"

  "꼭 뭐 부탁할 때만 존댓말하더라."

  "힝. 나 생각해 둔 게 있단 말이에요."

  "집에 재료도 없어."

  "여기 있네. 핫케이크 가루! 휘핑크림도 있고. 계란이랑 우유도 있고."

  "흠. 어쩐지 이상하게 딸기를 사 오고 싶더라니."

  "엄마 최고! 딸기케이크 만들면 되겠다! 야호!"

  "에휴."


  냉장고까지 열어 재료를 확인하는데 같이 안 만들 수가 있나. 스텐 볼, 거품기, 계량컵, 저울, 스파튤라, 빵틀을 꺼내 식탁에 놓으니 알아서 척척척. 말도 안 했는데 벌써 냉장실에서 우유와 계란을 꺼내 온다.


  케이크 반죽을 틀에 부어 160도에서 45분간 굽는 동안, 깨지 말았어야 할 요리 본능이 발동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면서 과하지 않은 음식이 뭐가 있을까. 고구마 3개를 물에 넣고 는 사이, 상추와 노랑 빨강 파프리카를 썰고 냉동실에서 김밥용 김과 감태를 꺼냈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참치 캔을 따서 기름을 따라 버리고 후추 톡톡, 마요네즈 한 번 짜서 젓가락으로 뒤적였다.


  잘 구워진  케이크 시트를 뒤집어 철망에서 식히는 동안, 남은 반죽에 제티 2봉을 넣고 섞어 파운드케이크 틀에서 2차로 구웠다. 딸애가 데코를 위해 휘핑크림과 씨름하는 사이, 나는 밥에 간을 하고 김으로 돌돌 만 다음, 한 입 크기로 잘라 참치와 양배추샐러드를 올렸다. 감태는 첫 시도니까 딱 한 줄만. 역시 한 입 크기로 썰어 감태롤들기름과 통깨와 백명란을 섞어 젓가락씩 올렸다. 네모나게 자른 노랑 빨강 파프리카로 화룡점정.


  딸기로 산타를 만들던 딸애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와! 엄마 이게 다 뭐야?"

  "케이크만 으면 심심할까 봐."

  "와! 트리는 어떻게 만든 거예요?"

  "푹 찐 고구마를 포크로 으깨 소금, 후추, 꿀, 마요네즈 넣고 섞은 다음 비닐에 넣고 원뿔로 모양 잡아서 세워. 가위로 비닐을 잘라서 걷어 내트리 기둥이 돼. 거기다 이쑤시개를 꽂고 상추, 딸기, 파프리카를 끼워 장식하면 끝!"

  "와!"


  딸애는 두 번째로 구워진 초코파운드케이크를 반으로 잘라 루돌프로 꾸몄다. 그리하여 탄생한 우리의 '미리 크리스마스 다이닝 리미티드 에디션.'


  두 시간 반이나 걸려 완성했지만 남편과 아들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찰칵찰칵찰칵.

  "나 배고파. 9시가 다 돼 간다고."

  "잠깐! 아직 남은 게 있어요!"

  "아웅. 또 뭐? 배고파서 엄마 지금 무지 예민하다. 얼른 하자 딸."

  

  코스별 메뉴에 대한 상세 설명이 끝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는 슬픈 전설이. ㅜㅜ


  

  딸. 미리 크리스마스 했으니,
다음 주엔 시켜 먹으면 안 되겠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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