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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Dec 20. 2023

눈[雪]이 그렇게 좋아?

  저녁 밥을 준비하러 방에서 나온 순간, 작은애의 성화가 이어졌다.


  "엄마. 우리 밖에 나가요. 이제 막 눈 오기 시작해요!"

  "지금 나가면 저녁 준비는 어떡하고. 아빠 오늘 바로 퇴근하신다는데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해?"

  "엄마 나오기만 기다렸단 말이에요. 그러다 눈 그치면 어떡해요?"

  "이제 내리기 시작해서 나가 봐야 아무것도 못 만들어. 좀 쌓일 때까지 기다리자. 밥 먹고 나감 되겠네. 바로 밥 안칠게."

  "엄마 미워!"

  쿵. 언제나처럼 굳게 닫히는 방문. 아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야. 코르티솔 과다 분비로 날로 부신이 커지는 섬뜩한 느낌. 중2병만큼 무서운 게 초5병이라더니 두 애들 틈에서 명이 준다 줄어. 눈이 그치면 뭐? 내가 눈더러 그치랬나. 중얼중얼 구시렁구시렁.


  있는 반찬에 국만 데우고 끓는 물에 프랑크 소시지 데쳐 케첩이랑 냈다. 냉랭해진 분위기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잘 먹었습니다." 달그락달그락. 주방엔 설거지 소리만 가득. 애들이 일어나고 남편의 저녁상을 다시 봐서 원터치 상보로 덮고 패딩 점퍼를 몸에 걸쳤다.


  "딸, 가자!"


  작은애의 걱정대로 눈은 내리지 않았고 노면과 자동차 보닛에 아주 얇게 쌓여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눈 찾아 삼만 리.' ㅜ.ㅜ 그나마 공원에 조금 쌓인 눈은 부지런한 미화원 어머니께서 싹싹 쓸어 흔적도 없었다. 빗자루질로 생긴 결이 바닥에 이삭 모양으로 굽어져 있을 뿐이었다.


  "아주머니 너무 열심히 일하셨네. 눈이 없다, 눈이 없어. 그래도 걱정 마. 우리에겐 아지트가 있잖아."


  우체국 뒤 계단을 따라 테니스장 옆 쉼터에 도착했다. 많이는 아니지만 길 위, 체력 단련 시설, 벤치 그늘막 지붕, 바위, 풀숲에 눈이 쌓여 있었다. 작은애가 여기저기서 열심히 그러모아도 얼마 안 됐다. 뭉쳐지지도 않았다. 추울 때 내려서인지 퍼슬퍼슬했다. 한데 모은 눈은 굵은소금 같기도, 깃털 같기도, 유리 파편 같기도 했다. 


  "와. 사십 평생 이런 눈은 처음 봐. 현미경으로 보면 어떤 결정일까."

  "거봐, 나오길 잘했지? 나는 복덩이라니까. 내 덕에 엄마 글감 또 생겼잖아."

  "그러게. 아까 화내서 미안."

  "나도 미안해 엄마."

  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쌓인 눈이 흩날렸다. 바위에 앉은 순백의 눈은 설탕처럼 빛났다.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베란다 섀시를 열고 밖을 내다봤다. 밤새 눈이 내렸는지 길가와 아파트 주차장이 '크라운 산도' 속 크림색을 하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참도 그냥 지나가겠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 학교 가기 전에 단지 앞 놀이터에서 잠깐 놀고 오면 안 돼요?"

  "그러다 지각해. 학교 가서 놀아."

  "핸드폰 갖고 갈게요."

  "그래라. 에휴."


  아이가 벗어 놓고 간 장갑을 여러 번 헹구어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하원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갔다. 제법 눈이 쌓여 있었다. 하루 종일 신났겠군, 우리 딸. 웃음이 났다.


  "엄마. 내가 아침에 눈사람 들어갈 성(城) 만들어 놨거든? 같이 눈사람 만들어서 거기 넣어 주자."

  "장갑 다 빨아서 엄마 맨손이야. 혼자 만들어."

  "힝."


  푹 빠져서 만드는 모습이 예뻐 말없이 보기만 했다. 그러다 슬쩍슬쩍 사진을 찍었다. 눈이 뽀득뽀득 밟혔다.


'꼬마 눈사람 성에 넣어 친구 만들어 주기 미션'을 완수한 후에야 딸애는 발걸음을 돌렸다(ㅜ.ㅜ).


그리하여 장갑 세 개가 모두 다음 눈놀이를 위해 잠시 휴식 중.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이 평온을 깨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 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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