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복여중 박 작가

by 어슴푸레

음악 가창 시험을 보거나, 교내 합창 대회 연습을 위해 파트별로 악보를 외울 때면 정연성 선생님이 피아노로 첫 음을 쳐 주곤 했다. 어느 날은 '솔'을, 또 어떤 날은 '미'를 쳤다. 그 음을 머릿속에 각인하고 <그 집 앞>이나 <에델베이스>를 불렀다. 내 음역은 알토 아니면 메조소프라노였다. 소프라노로 분류되면 '노래를 잘하는 아이'로 자동 인식되었다. 피아노 좀 치는 애들은 제일 잘 치는 곡으로 테스트를 받고 합창 대회에서 반주를 하거나 지휘를 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한 달 전부터 대회 연습이 이어졌다. 반별로 시간을 맞춰 주말에도 모였다. 여린 빛이 짙어지는 여름의 길목. 유월의 토요일은 매주 눈부셨다. 영복여중 강당 야외엔 운동장 우측으로 키 작은 벽산 아파트가 보였다. 교정엔 향나무 향기가 가득했다.


살면서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냐고,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냐고 물으면 1초도 안 돼 중학생 때라고 대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학교 가는 것이 그저 좋았다.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학교에 있으면 편안했다. 영복여중은 사계절 초록으로 덮여 있었다. '무다리 고개'를 헉헉거리며 오르면 중턱에 매점이 나타났고, 내처 걸으면 작은 동산에 이사장 동상이 서 있었다. 봄이 오면 백목련이 '개 혓바닥'을 닮은 교복 블라우스 칼라처럼 길쭉하고 통통하게 벙글어졌다. 월례고사를 볼 즈음엔 벚꽃으로 교문 양옆 진입로에 비가 내렸다. 오월엔 붉고 진한 영산홍이 바위틈에서 피었고 스승의 날 즈음엔 보라색 등꽃이 핀 벤치에 졸업생이 인기 있는 선생님을 찾아와 담소를 나누었다. 희고 긴 커튼이 일렁이는 창가에서 그런 선생님과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언니나 대학생 언니를 보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좋은 대학을 가서, 국어 선생님이 돼서 모교에 다시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매해 스승의 날이면 맹렬히 꿈꿨다.


여름 방학을 할 때쯤이면 학교엔 매미 소리가 가득했다. 엥엥엥엥 매앰-. 소나기 내리듯 일제히 쏴- 했다. 중 3 방학 땐 보충 수업을 위해 몇 시간씩 학교에 있었다. 칠팔월 오전 열기를 선풍기 네 대로 식히기란 역부족이었다. 종아리로 땀이 주르륵 흘러도 좋았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실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엔 국어 선생님이 계셨다. 나는 신규 도서를 카드에 적는 일을 도왔다. 고맙다고 교사용 국어 자습서와 문제집을 몇 권 주셨다. 선생님은 창을 등지고 타자기를 쳤다. 탁탁탁탁 드르륵. 탁탁탁탁 드르륵. 선생님은 시를 쓰고, 나는 목록을 정리했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중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리고 선생님 같은 시인이 되고 싶다 생각했다.


가을이면 운동장 스탠드를 빙 둘러 플라타너스가 커피색으로 물들었다. 도시락을 먹고 스탠드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 점심시간이 끝났다. 교정엔 방송반에서 선별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선생님은 주로 담배를 피우며 잰걸음으로 걸었다. 마주치면 한껏 밝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희화와 나를 보고 "좋을 때다!" 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곧 고등학생이 되는데 뭐가 좋다는 건지. 할 수만 있다면 1년 더 영복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영복여고가 아닌 동우여고에 배정받았다. 영혼이 살찌는 느낌을 매일매일 받는 이곳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수학을 못했다. 모의 연합고사 성적에서 수학은 심각한 싱크홀이었다. 수학은 싫었지만 선생님은 좋았다. 청치마를 주로 입는 쇼트커트의 원희진 선생님은 아기 곰처럼 순둥순둥했다. 흰 피부에 작은 눈으로 귀엽게 웃었다. 30cm 자를 들고 다녔지만 한 번도 애들을 때리지 않았다. 번호를 호명당해 칠판 앞으로 나와 소인수분해를 풀면 선생님이 지켜보았다. 겨우 답을 적으면 "수고했어." 했다. 수학을 못했지만 선생님은 내 이름을 알았다. 방학이면 댁으로 편지를 보냈다. 뭔가를 잘하지 않아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기적처럼 좋았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1년 남짓 수학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야간자율학습시간이 시작되는 저녁 여섯 시 오십 분쯤이었다. 해가 지고 창밖과 교실이 어둠으로 물드는 그 시간에 주로 썼다. 어서 대학생이 되기를 또 맹렬히 꿈꿨다.


대학에 가고 동아리 문집을 들고 국어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성인이 된 나에게 동동주를 사 주셨다. 내 시를 찬찬히 읽고 "좋구나." 했다. 정말로 시를 쓸 수 있을까. 설레고 두려웠다. 끝내 시를 쓰지 못했고 나는 사회인이 되었다. 문학이 아닌 어학을 선택했고, 작가가 아닌 연구자가 되고자 했다. 그 무수한 시간의 점들 사이에 조찬용 선생님이 계셨다. 대학 입학과 졸업, 결혼과 출산. 복직과 박사 과정 입학. 퇴사와 프리랜서의 삶. 매번 지각하듯 뒤늦게 알려 드렸다. 그러나 선생님은 한 번도 섭섭해하지 않으셨다. 탓하지 않고 응원하셨다.


선생님이 아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가 아니어도 내 이름의 책이란 게 세상에 나오는 날, 선생님이 그랬듯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생님께 드리고 싶다. 어쩌면 매일 조금씩 이렇게 글을 쓰는 건 그날을 위해 또 맹렬히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언제나처럼 곁에 선생님이 계셔 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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