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꾸. '다이어리 꾸미기'의 줄임 말. 중고등학교 때도 비슷한 게 있기는 했다. 화서동 모닝글로리나 남문 아트박스에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다이어리와 스티커가 많았다. 흰 종이에 형광펜과 젤 펜을 그어 보고, 수정액을 흔든 뒤 힘주어 짰다. 하이테크 펜은 날씬한 필체를 자랑했지만 심이 얇아 쓸 때마다 주의를 요했다. 한 자루에 3천 원이나 하기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반면에 모나미 젤러 펜은 하이테크 펜의 1/6 가격이었다. 맘에 드는 젤러 펜과 형광펜을 한 손 가득 쥐면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월별 캘린더에는 별달리 적을 게 없었다. 월례고사, 모의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도학력고사 등 각종 시험과 소풍, 수학여행, 수련회 등 학교 행사. 몇몇 친구의 생일 정도가 적혔다. 열두 달 캘린더가 끝나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여백이 싱겁게 넘어갔다. 뒷부분엔 작은 모눈이 격자무늬로 가득했다. 학급 청소가 끝나고 종례 시간을 기다리는 사이, 뒷자리에 앉은 미선이와 그 모눈종이에 오목을 두었다.
벽산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 골목으로 들어가면 OO서적이 있었다. 주로 등교하기 전에 그 서점에 가서 <좁은 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호밀밭의 파수꾼> 등의 세계 명작을 샀다. 왼쪽 나무 책장을 위에서 아래로 훑으며 끌리는 제목 앞에서 검지손가락을 책머리에 대고 쏙 뽑았다. 3천원 정도의 두껍지 않은 책으로 표지는 대부분 파스텔 톤이었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걸으면 오른쪽에 바로크 음악사가 나왔다. 음악 감상 시험 범위인 모차르트, 슈베르트, 드보르자크의 교향곡들을 공테이프에 녹음해 팔았다. 레코드점에선 클래식 음악이 매일같이 흘러나왔고, 유리창엔 '영복여중 음악 시험 음반 있음'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교문을 나오면 다 허물어지다시피 하는 한옥에 갔다. 간판도 없는 무허가 떡볶이집이었다. 흰 비닐을 씌운 옥색 타원형 플라스틱 접시에 떡볶이 200원어치를 받아 경미와 일렬로 앉았다. 어묵은 너무 조금 들어서 늘 아쉬웠다. 참 많이 걸었다. 골목을 구경하듯 걸으면 소란한 것들이 조용해지는 기분이었다. 화서문까지 걸어가 오른쪽으로 쭉 가면 회색 시멘트 길이 이어졌다. 빨간 깃발을 단 점집이 많았다. 한참을 걸으면 동쪽에 고딕 양식의 고동색 수원제일교회가 보였다. 성처럼 높이 서 있어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장안문에서 팔달문으로 가기 전까진 교복집이 많았다. 북수동성당 오른쪽으로 스마트, 나라미, 엘리트, 정혜 패션 등이 띄엄띄엄 있었다. 교복거리가 나오는 그 길까지 매일 40여 분 이상을 걸어서 29번 버스를 탔다.
아무것도 없던 흰 여백엔 읽은 책의 글귀가 적혔다. 형광펜이나 색연필로 글씨를 따라 음영을 줬다. 가을이면 운동장에서 단풍잎과 벚나무 잎을 주워 다이어리에 꽂았다. 가끔 친구들이 다이어리를 구경했기에 내밀한 이야기를 적지는 않았다. 대신 그 주나 그날의 감정을 비슷한 소설의 구절을 가져와 기록했다. 필름은 귀했으므로 사진을 찍어 인화할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올록볼록 투명 스티커와 반짝반짝 홀로그램 스티커로 포인트를 주었다.
다이어리엔 윤기에게 편지를 받은 날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날 바로 답장을 써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돌돌돌 말아 금실로 묶는 편지지는 너무 비쌌다. 편지지 여섯 장에 봉투 세 개가 들어 있는 세트는 늘 편지지가 모자랐고 봉투가 남았다. 두 장은 기본, 세 장을 쓸 때가 많았다. 윤기는 키가 컸고 3년 내내 반장을 했다. 공부를 잘했고 상냥했다. 눈이 컸고 얼굴이 잘 빨개졌다. 윤기 주위엔 키 큰 아이들이 많았고 인기도 많았다. 수학을 특히 잘했고 시를 잘 썼다. 나는 키 성장이 멈춘 듯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앞 번호가 되었다. 윤기와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더 이상 북수당성당까지 걷지 않았다. 그 대신 장안공원 앞에서 66번 버스를 타고 집에 같이 갔다. 말수 적고 재미없고 수학 못하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 신기했다.
고 2때까지는 '다꾸'를 했었다. 고 3 때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는 동안 다이어리에는 입시나 점수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적혔다. 책을 읽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도서관에서 중요한 건 대출이 아닌 열람실 확보였다. SK그룹이 수원에 만들어 준 '선경도서관'이 고 1 때 개관했다. 거기서 단 한 번도 책을 빌리지 않았다. 오로지 수능 준비를 위해 언덕을 올랐다.
새해가 되고 딸애와 아트박스에 갔다. 예정에도 없이 다이어리를 샀다. 오늘부터 자기와 같이 다꾸를 하자며 지치지도 않고 내가 좋아할 만한 샘플을 꺼내다 줬다. 파워 긍정 스티커를 사고, 스트레스 받을 날을 대비해 '센' 말이 적힌 스티커도 샀다. 그리고 어제 저녁, 두어 시간 동안 '다꾸 삼매경'에 빠졌다. 이따금씩 30여 년 전의 내가 소환되었다. 올해 다이어리엔 어떤 글귀와 말들이 기록될까. 그것들이 글감이 될 생각에 몹시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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