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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Jan 18. 2024

추억 돋네

  이른바 신어(neolosism)의 일면을 보고 있으면 날로 각적이고 세진다는 걸 느낀다. 좋을 때나 싫을 때나 '개-', '캐-'를 막 붙이고, '핵(核)'과 '찐(←眞)'을 경쟁하듯 붙인다. 십대에게서는 '개좋아', '캐싫어'가, 이십대에게서는 '자소서(자기소개서) 핵싫어'가, 이삼십대에게서는 '찐이야 찐. 찐 사랑이라고'를 조금만 걸어도 들을 수 있다. 잠깐 스치는 것만으로 귀가 피로하다.


  최근 들어 유독 귀에 거슬리는 표현으로 '추억 돋네'가 있다. 과거의 어떤 대상, 일, 감정, 기억 등이 피부에 소름 돋듯 불러일으켜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추억이라는 추상명사가 '돋다'를 만나 구체성을 띤다. 말이 안 되는 것도 같고 되는 것도 같고. 처음 들었을  어, 참신하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돋다'가 추억뿐만 아니라, 귀염, 매력, 가창력까지 명사 자리에 온다는 것이다. '돋다'의 의미론적 제약을 심각하게 깨 나가고 있어 잠깐의 참신함이 일반성을 띨까 걱정이다. 이러나 'N 돋네'가 무한 증식할 것 같아서.


  우려가 현실이 됐다. <우리말샘>에 '돋다009'가 다음과 같이 올라 있다.

  풀이가 적절한지, '돋다009'를 올릴 게 아니라 '매력 돋다'를 올려야 하는 건 아닌지 잠깐 생각했다. 일반인 제안 어휘를 우선적으로 등록하는 것이 <우리말샘>이라고는 하나, '매력 돋다'의 아버지 격인 '추억 돋다'나 '추억 돋네'가 없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추억 돋네'를 파기 시작했다.


  빅카인즈에서는 2023년, 2024년을 통틀어 34건밖에 검색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훨씬 예전부터 쓰였는데. 그래서 이번엔 네이버 뉴스를 뒤졌다. 한국일보 2020년 6월 28일 기사에 '얘기하다 보니까 막 추억 돋.."라며 눈치 없이 말을 덧붙여 송다희의 마음을 상하게 해 어쩔 줄 몰라 하기도.'가 나왔다. '추억 돋네', '추억 돋는', '추억 돋았다' 등의 활용 형태가 아닌 어미를 통째로 날린 형태이니, '추억 돋네'는 이보다 더 먼저 쓰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뭐가 됐든 '추억 돋네'가 뉴스 기사 등으로 신어로서의 공인성을 얻은 것은 대략 2020년 전후라는 얘기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말들이 커뮤니티나 갤러리 등에서 유행하다 뉴스 기사 등으로 넘어오는 것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더 집요하게 파고 팠다. 두둥! 드디어 찾았다 요놈.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음악]아 추억돋는다 이브, g고릴라, 내 귀에 이런 애들 아냐??ㅋㅋ

간만에 이브, 고릴라, 내 귀에 도청장치, 네메시스 얘네 라인 노래 듣고 있는데 ㅋㅋㅋ 진짜 추억돋으면서 좋다 ㅋㅋ  특히 고릴라 노래는 진짜 지금 들어도 존나 좋네 ㅋ...

[엌쌀듯옄] 2010-07-24 16:29:38


<페이스북>

#크레이지러브 2015. 3. 15. 쿨- 작은 기다림... 추억돋네요..


<디시앤갤러리>

세류역 노래방 추억 돋네요 ㄹㅇ. 성령하나님; 2019. 11. 28. 21:58


  급기야 '추억돋이'의 복합어 형태까지 발견되었다.


<티스토리>

30대 이후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노래이자 추억돋이의 갑은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이다. 2016. 3. 1.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음지에서의 개인어 뉴스 기사 등 언중의 승인을 받아 신어로 공인되는 과정이. 그다음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과연 신어란 무엇인가'였다. ㅜ.ㅜ


  작년 내내 품고 있었으나 발전시키지 못한 주제였다. 임시어(nonce word) < 신어(neolosism) < 미등재어(unregistered word) < 등재어(words of dictionary)의 공인화 과정(institutionalization of words)이 반드시 정방향이며 단방향인가와도 맞닿은 문제였다. 이미 사전에 있지만 사어가 되고 있거나 애초에 유령어였던 말들은 공인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막막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추억 돋네'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알게 된 건 소기의 성과. 이후 '추억 돋네'의 연접어로 '감성', '목소리', '체험', '추석날', '산길' 등이 뽑힌 걸 보니 어떤 장면이나 국면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다음 주제는 자연스럽게 환유와 은유인가.  


  에휴.


#nonce word#unregistered word#neolosism#institution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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