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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Jan 21. 2024

서촌에 가면 수원 남문이 생각난다

  개인적으로 서울에서 서촌을 제일 좋아한다.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를 거슬러 걸으면 복날 저 아래까지 줄이 길어지는 삼계탕집이 보이고, 우리은행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이상의 집을 시작으로 이태리 음식점, 태국 음식점, 일식 음식점이 이어진다. 쭉쭉 들어가면 헌책방에서 카페가 된 대오서점과 뽕뿅뿅 옥인오락실, 즉석 떡볶이 최강 남도분식이 나온다. 세종마루정자 쪽으로 걸어 나오면 왼쪽에 효자베이커리가, 할인 마트 골목으로 들어가면 통인시장이 나타난다. 기름떡볶이를 먹고 있으면 전집, 만두 가게, 국밥 가게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약과와 꽈배기와 알배추와 감귤과 닭꼬치와 떡갈비와 김밥과 고로케가 외갓집 광처럼 그득그득하다. 도심 속 서촌의 모습은 이색적이면서 반갑다.


  경신 샘, 선아 샘, 윤희 샘을 서촌에서 만났다. 뜨끈한 국수로 속을 채우고 찻집에서 담소를 나누고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눈이 오락가락하더니 4시가 넘어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창밖으로 경복궁역 차도와 골목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작은 횡단보도 앞뒤엔 버스 정류장이, 그 근처로 키 낮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분식점과 아기자기한 카페. 2, 3층 높이의 벽돌색 가게와 멀리서도 보이는 은행들. 딱 수원 남문의 모습이었다.


  어떤 골목으로 들어서든 길은 하나로 이어졌다. 작은 혈관들이 모여 큰 혈관을 이루듯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시작하는 골목들은 좁고 짧았다. 끝날 것 같은 골목에선 어김없이 길이 갈라졌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 길은 한길로 이어졌다. 로데오거리를 지나 수원향교로 뻗거나, 행궁동을 지나 구 신풍국민학교로 뻗는 식이었다. 그 두 갈래의 길은 빙 둘러서 수원을 길게 감쌌다. '팔달산'을 오르면  경사가 가팔라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아니면 다람쥐처럼 팔딱팔딱 뛰어서 올라야 그나마 힘이 덜 들었다. 그래서 그 산은 '팔딱산'이었다. 명실상부 수원의 문화생활을 책임지던 중앙극장 앞에는 친구나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복작복작했고 골목 안쪽엔 '로얄극장'이 조그맣게 있었다. 맞은편 팬시점엔 펜과 인형 등을 사려는 여학생들로 늘상 붐볐다.


  서촌의 한 술집에서 활기찼던 수원의 남문 골목길이 문득 생각났다. 작은 혈관들엔 피와 산소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았고 어디서든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던 남문엔 적막감만 감돌았다. 수원 역사가 새로 지어지면서 남문의 상권은 심각하게 무너졌고 어느 날부터 문 닫은 가게가 문 연 가게보다 많았다. 라볶이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옷을 사고 책을 사고 팔달산을 오르고 영화를 보고 스파게티를 먹고 돈가스를 먹고 햄버거를 먹고 생과일을 먹던 그곳이 급격히 쇠락하는 것을 아프게 지켜보았다. 서울로 시집을 오고 수원의 남문이 생각나는 날은 적었다. 그러다 어제야 처음 알았다. 내가 왜 서촌을 이토록 좋아하는지. 사람 냄새 나는 그곳은 2, 30년 전 수원 남문의 모습과 완벽히 대칭이었다.


#서촌#수원#남문#말을걸어오는거리#그리움#기억#퀘렌시아#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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