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우연히 발견한 '짱구분식' 간판 덕분에 20년 전 각각 205호, 302호 연구실에서 근무하며 지냈던 샘들을 10여 년이 지나 재회했다. 이렇게 원년 멤버 넷이 만난 건 2009년 6월, 결혼한다고 인사동에서 청첩장 돌릴 때가 마지막이었다. 영심 샘, 영수 샘, 영덕 샘. 그리고 나. 이름엔 모두 '영' 자가 들어갔다. 그래서 단톡방의 이름을 '영영클럽'이라 지었다. 길게 연을 이어 나가고, 처음 만난 그때처럼 젊게 살자는 의미에서 永young클럽.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영심 샘은 교수가 되었고, 영수 샘은 부장님이 되었고, 영덕 샘과 나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네 사람 모두 사전 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영수 샘은 기억하실까. 우리 나중에 쉽고 재밌는 학습용 사전 만들어 보자셨던 걸. 샘이 새 곳으로 사전 일을 하러 퇴사할 때후련해 보였고 원하는 곳으로 이직할 수 있는 샘의 능력이 나는 한없이 부러웠다.
20대의 나는 세 분 선생님들을 '묻지도 따지지 않고' 따랐다. 위로 열 살 안팎의 샘들은 아는 게 많았다. 대화를 나누면 새로운 세계가 하나씩 열렸다. 설익은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셨다. 샘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다. 판단하지 않았다.
우리는 점심시간마다 같이 근린공원을 걸었고 퇴근 무렵 딱 한 잔만 하자는 말로 능마루에 갔다. 봄엔 벚꽃놀이를, 여름엔 남산 식물원에 나들이를 갔다. 연가를 맞춰 여름휴가로 울릉도에 가기도 했다.
영수 샘의 팔짱을 스스럼없이 꼈다. 20년 전 대림역 근처의 아파트 앞에서처럼. 봄꽃 냄새와 가을 냄새를 맡으며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갔던 때처럼. 영덕 샘의 말과 눈빛에 스르르 빠져들었다. 웃으며 이야기할 때 오른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는 모습도 여전했다. 미리의 야생성을 생생하게 전하는 영심 샘은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다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지침적 지주'가 되어 주셨었다.
오늘의 만남 또한 말로 다 못 할 만큼 애틋했다. '짱구분식' 사진을 보고 영수 샘이 바로 날 잡자고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협심해서 넷이 보는 날은 없었을 거였다. 사소한 풍경을 지나치지 않은 나님에게 1차 칭찬. 적극적으로 추진해 주신 영수 샘께 2차 감사. 학교에서 서촌까지 와 주신 영심 샘께 3차 감사. 시어머니도 댁에 계신데 흔쾌히 나와 주신 영덕 샘께 4차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