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옷핀을 보는 날은 많지 않았다. 반짇고리함은 손이 닿지 않게 고동색 장롱 위에 올려져 있었고, 엄마가 양말을 꿰맬 때나 이따금씩 내려졌다. 실패와 바늘이 자주 들려 나왔지만옷핀은 함 구석에 얌전히 있는 날이 많았다. 내복 바지의 고무줄이 헐렁해져 어기적거리면 옷핀은반짇고리에서 엄마 손에 딸려 나왔다. 노란 국수 가락처럼 생긴 고무줄을 옷핀에 묶어 허릿단의 구멍에 넣고 살살 잡아당겨 한 바퀴 돌리면 요술처럼 끼워졌다. 제 몫을 다한 옷핀은 반짇고리함 속에서 다시 다음을 기다렸다. 옷핀은 아주 잠깐 쓰였다. 언제 불려 나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커서도 옷핀을 보는 날은 많지 않았다. 시집와 새로 마련한 반짇고리함과 휴대용 반짇고리에 어김없이 있었지만 쓰는 날이 거의 없었다. 세탁 중에 줄이 빠진 추리닝 바지를 고친다고 딱 두 번 옷핀 구멍에 줄을 묶어 허릿단 구멍에 넣고 빙 둘러 밖으로 빼냈었다. 역시나 쓰임을 다한 옷핀은 반짇고리함에 담겨 화장대 서랍 속에서 다음날을 기약했다.
낭패의 순간. 당황의 순간. 불편의 순간. 미흡의 순간. 옷핀은 둥글고 긴 몸을 열어 우주를 품고 경계를 가볍게 잠근다. 벌어진 앞섶을. 망가진 치마 훅을. 끌리는 바짓단을. 벙벙한 허리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