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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Feb 23. 2024

옷핀의 쓸모

  어려서 옷핀을 보는 날은 많지 않았다. 반짇고리함은 손이 닿지 않게 고동색 장롱 위에 올려져 있었고, 엄마가 양말을 꿰맬 때나 이따금씩 내려졌다. 실패와 바늘이 자주 들려 나왔지만 옷핀은 함 구석에 얌전히 있는 날이 많았다. 내복 바지의 고무줄이 헐렁해져 어기적거리면 옷핀은 반짇고리에서 엄마 손에 딸려 나왔다. 노란 국수 가락처럼 생긴 고무줄을 옷핀에 묶어 허릿단의 구멍에 넣고 살살 잡아당겨 한 바퀴 돌리면 요술처럼 끼워졌다. 제 몫을 다한 옷핀은 반짇고리함 속에서 다시 다음을 기다렸다. 옷핀아주 잠깐 쓰였다. 언제 불려 나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커서도 옷핀을 보는 날은 많지 않았다. 시집와 새로 마련한 반짇고리함과 휴대용 반짇고리에 어김없이 있었지만 쓰는 날이 거의 없었다. 세탁 중에 줄이 빠진 추리닝 바지를 고친다고 딱 두 번 옷핀 구멍에 줄을 묶어 허릿단 구멍에 넣고 빙 둘러 밖으로 빼냈었다. 역시나 쓰임을 다한 옷핀은 반짇고리함에 담겨 화장대 서랍 속에서 다음날기약했다.


  낭패의 순간. 당황의 순간. 불편의 순간. 미흡의 순간. 옷핀은 둥글고 긴 몸을 열어 우주를 품고 경계를 가볍게 잠근다. 벌어진 앞섶을. 망가진 치마 훅을. 끌리는 바짓단을. 벙벙한 허리통을.


  옷핀의 쓸모에서 문득 삶의 태도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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