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겨레말큰사전 실장이신 한용운 선생님을 만났다. 동명의 민족 시인과 한자까지 똑같이 쓰는 선생님은 내가 존경하는 사전편찬가 중 한 분이다. 응당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선생님께서는 <내가 만드는 사전>을 받으신 직후 꼭 한번 식사를 함께하자고 하셨다. 학회나 사업 중간 발표회, 사전 심의회 등 공적인 자리에서 주로 뵈었기에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고민을 좀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꼭 20년 전에 선생님을 처음 뵀었다. 평균 열 살 위의 사전편찬가들이 참석한 월례 회의에서였다. 원에서 사전 일을 처음 배우던 꼬꼬마 시절. 회의 안건들에 대해 차분히 당신의 의견을 내는 모습을 팬심(?)으로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점잖고 다감하고 차분하고 잔잔하고 단단하셨다.
국어사전이 국내에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전. 국어학회 겨울 학술대회에서 4,500원짜리 <한국사전학연구> 1, 2권을 사서 읽은 것에서 사전편찬가로의 운명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고 하셨다. 이후 국내의 국어사전에 나타난 보조사 뜻풀이를 비교 분석해서 석사 학위를 받으셨다고 했다. 사전은 민간 출판사에서 하는 것이지 학위 논문의 주제가 될 수 없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고 했다. 당시'사전학(lexicography)'의 역사가 영국에서 300년 가까이 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이제 막 이상섭 교수님의 논문이 <한국사전학연구>에 실리는 때였다고 했다.
-영어사전의 할아버지 되시는 새무얼 존슨이 1700년대 자신이 만든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에 'lexicography(사전학)'에 '-er'을 붙여 'lexicographer(사전편찬가)'라는 말을 만들어 올렸어요. 뭐라고 뜻풀이했는지 알아요?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멋지지 않아요?
-사전 만들다 보면 남에게 해 끼치려고 생각할 시간이 없어. 시간이 너무 금방 가. 벌써 그 당시에도 그 양반은 자료 엄청 봤었는가 봐. 아휴. 우리가 엑셀 보는 거랑 똑같지 뭐. 허허허허 허허허허허.
-1900년대 초에 <악마의 사전(The Devil's Dictionary)>이란 게 나왔어요. 빨간 표지에 사전 형식인데 뜻풀이가 아주 독특해. 이를테면 행복을 뭐라고 정의했냐면 '타인의 불행을 보면 생기는 기분 좋은 느낌.'
-박 선생님 책도 비슷했어요. 정독하진 않았지만 가끔 꺼내서 한 꼭지씩 읽는데 좋더라고요. 애 많이 썼어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내내 스르르 미소가 지어졌다. 중간중간 울리는 바도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단연 새무얼 존슨의 '사전편찬가'에 대한 정의였다.
A writer of dictionaries; a harmless drudge, that busies himself in tracing the original and detailing the signification of words.
꼭 사전편찬가라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이와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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