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하고 화해했어?
-화해는 무슨. 뭐 싸웠나.
-그 뒤로 다른 말씀 없었어?
-응.
-전화드리지 그래?
-뭘. 속만 상하지.
지난 10월 23일. 딸애와 떠난 부산 여행 2일 차. 해운대 시장 근처의 지역 대표 어묵집에서 시댁과 친정에 어묵 세트 하나씩을 택배로 부쳤다. 두 분 드시기 많을까 봐 가장 작은 거. 5만원도 안 되는 상품으로 골랐고 따로 문자나 카톡을 보내지는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그 주 주말에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우리 딸 엄마가 심하게 했나. 웬 뇌물이야. 단단한 땅에 물이 고인다는 속담도 있다. 한푼이라도 아껴서 살아라. 늙고 보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다. 그저 아프지 않고 마음만 편하면 그게 제일 큰 행복이구나. 헛돈 쓰지 말고. 잘 살아라.
-어묵 선물 잘 받았다. 선물하고 핀잔 듣고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야.
뇌물이라는 말에, 헛돈이라는 말에 속이 확 상했다. 이제껏 무얼 바라고 한 적은 없었다.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 그 연세에도 일하시고 바둑이처럼 집만 지키는 두 분이 가슴에 걸려서 여행지의 유명한 음식을 몇 번 보낸 게 다였다. 이제껏 그런 내 마음을 뇌물이라고 생각하셨단 건가. 마음에 안 드는 선물일지라도 일부러 생각해 보낸 자식에게 헛돈 썼다고 할 수 있는 건가. 화가 났지만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 뭐가 그렇게 엄마 마음을 언짢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여기는지 몰랐다고. 이젠 안 보내겠다고. 여행 갔다가 생각나서 보냈을 뿐 뇌물도 헛돈도 아니었다고.
그 일이 있은 후 일주일쯤 지나 고구마 좀 보내 줄까. 엄마에게서 톡이 왔다. 미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시는구나 알면서도 옹졸해진 마음은 펴지지 않았다. 아버님이 사 주신 게 이미 있다고. 무거운데 고생하시지 않으셔도 된다고.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라고. 용건만 간단히. 메시지를 남기고 약 두 달이 지났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알았다. 난 여전히 착한 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구나. 안 보내도 되는 걸 굳이 보내 놓고 서운하다고 이러니 아직도 애구나. 헛돈이란 말에 버튼이 눌렸던 건 돈에 대한 공포에서 못 놓여났기 때문이구나. 뇌물이란 말에 긁혔던 건 저 밑에서 도사리고 있던 그 마음을 엄마가 정확히 간파해서 수치스러웠던 거구나. 엄마는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 딸이 안쓰러워 한 푼이라도 아껴서 잘 살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아는 것과 실천하는 건 달랐다. 엄마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2주 후면 서산에 내려가야 한다. 그 주 주말에 엄마 음력 생신이 있다. 지난 추석 때 안 내려갔으니 이번엔 가는 게 도리다. 머리로는 그래야지 하면서 가슴으로는 하. 한다. 며칠 전. 엄마, 아버지가 꿈에 보였다. 네 식구 딱 먹을 밥만 해 놓고 한 술 뜨려는데 두 분이 예정에도 없이 오셨다. 진지는 드셨냐고 하니 아버지가 먹었겠냐며 퉁명하게 쏘아붙이는 꿈이었다. 깨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미나이는 "지금 나는 내 식구(내 중심) 챙기기에도 벅차니, 외부의 짐을 더 얹지 말아 달라는 내면의 외침일 수 있습니다. 꿈속 상황은 님의 잘못이 아니라 '예고 없는 상황'이 문제였습니다. 현실에서도 예상치 못한 부담이 다가올 때,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라고 해석해 주었다. 부쩍 이런 유의 꿈만 꾼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무겁다.
딸애의 머리를 두고 고심했다. 다시 짙은 갈색으로 덮어야 할지를. 그러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다는 엄마의 촉을 최소한은 자극하지 않을 거였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고 학교로 돌아갈 건데 이젠 말해도 되지 않나 생각이 자반뒤지기를 했다. 수천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아도 차가운 비난에서 아이와 나를 지켜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시뮬레이션 1
-애 머리가 왜 이러니? 학교 안 가니?
-네.
-왜?
-좀 아파요. 2년 돼 가요. 우울증이에요.
-어린 게 어쩌다 그런 병을 다 얻었다니. 잘 좀 키우지. 넌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저 어린 게 우울증에 걸렸다니. 난 한평생 듣도 보도 못 했다.
-.......
시뮬레이션 2
-애 머리가 왜 이러니? 학교 안 가니?
-네.
-왜?
-좀 아파요. 2년 돼 가요. 우울증이에요.
-어린 게 어쩌다 그런 병을 다 얻었다니. 잘 좀 키우지. 넌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저 어린 게 우울증에 걸렸다니. 난 한평생 듣도 보도 못 했다.
-엄마는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겠어요. 우리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면서 어쩌면 남보다도 못하게 그래요? 오죽하면 엄마한테 말 안 했겠어요. 엄마한테 듣는 소리가 제일 아파요. 그래서 난 아무 말도 안 해요.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절대로. 한 번도.
시뮬레이션 3.
-애 머리가 왜 이러니? 학교 안 가니?
-네.
-왜?
-좀 아파요. 2년 돼 가요. 우울증이에요.
-어린 게 어쩌다 그런 병을 다 얻었다니. 잘 좀 키우지. 넌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저 어린 게 우울증에 걸렸다니. 난 한평생 듣도 보도 못 했다.
-그렇게 됐어요. 많이 좋아졌어요. 내년에 학교 다시 가요. 병원도 다니고 있고 상담도 받고 있고. 난 우리 딸 믿어요.
과연 나는 3처럼 대꾸할 수 있을까. 감정에 불이 붙어 2가 될 가능성 200%.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시달리듯 엄마의 푸념, 잔소리, 타박을 묵묵히 듣다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상경할 1의 가능성 100%.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고. 엄마에 대한 원망을 쏟아 놓으며 상관하지 말라고 할 N의 가능성 10%....... 여러 경우의 수를 놓고 머릿속으로 결과를 예측한다.
상대가 쏘았으나 빗나가 이미 땅에 떨어진 화살을 주워 일부러 가슴에 꽂는 일 따위는 그만하고 싶다. 그것이 수백 번 수천 번 2주 후를 시뮬레이션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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