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시루라는 말을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국민학교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57번까지 있었던 1학년 2반도 그랬지만, 망포리에서 출발해 수원 시내까지 들어가는 29번 버스도 등교 시간이면 늘 같은 모습이었다.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탔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아비규환 29번 버스. 8시 30분 등교에 8시 10분 차를 타지 않으면 꼼짝없이 지각을 해야 했다. 그보다 앞선 시간대의 버스를 탄다는 건 저학년 국민학생의 머리에서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버스 안내양의 불친절도 한몫했지만 계단 맨 아래까지 올라탄 학생들로 단 한 번도 제대로 닫히는 일 없이 몇 번을 접혔다 열렸다 하는 버스 문이 덜컹덜컹 영 불안했다. 결국 나는 그렇게 걷기 싫어 했던 산드래미길을 따라 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여섯 살에서 여덟 살이 되었으나 그 거리는 역시나 상당했다. 동네를 벗어나 아래로 아래로 걸으면 나타나던 두 갈래 길. 지름길인 논길과 빙 둘러 가야 하는 나촌말길. 지름길은 새마을유아원 가는 곳과 일정 부분 겹쳤고, 나촌말길을 빠져 나와 걸으면 맞은편에 태평양화학이 있었다. 한참 더 걸어 내려가면 원천유원지가 보였다. 내가 다니던 매원국민학교는 원천유원지 다음 정거장에 있었다. 지름길은 아이 걸음으로 25분이 조금 더 걸렸다. 버스나 걷는 거나 별 차이가 없었다. 고학년쯤 됐을 땐 15분까지 단축되었다. 그만큼 나는 걸음이 빨라졌고 중간중간 시계를 보며 뛰었기 때문에 가능한 시간이었다.
삼성전기를 지나쳐 횡단보도를 건너면 그때부터 기나긴 등굣길이 시작되었다. 트럭들이 지나는 자갈밭이 나왔고 더 걸어 내려가면 본격적으로 논길이 나타났다. 아득했다. 발을 내딛으며 바로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 길은 그 당시 도농 복합 형태의 수원 그 자체였다. 나는 사계절의 변화와 자연을 그 길에서 느끼고 알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논길이었다. 아지랑이 피는 봄에는 갈아엎어진 논흙이 숟가락으로 떠낸 모양을 하고 한쪽 방향으로 들어 올려져 있었고 4월쯤에는 모내기를 하려고 논둑길에 널브러뜨린 모판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벼들은 날마다 키가 컸고 개구리 울음소리도 점점 더 켜졌다. 논바닥에는 초록색 머리카락을 닮은 해캄과 500원짜리는 족히 넘는 크기의 논우렁이가 갈색 갑 속에서 졸고 있었다. 진녹색의 벼는 가을이면 거짓말처럼 누런 파도가 되어 넘실거렸고 논 중간중간엔 주황색 비닐 옷을 입은 허수아비가 기우뚱 서 있었다. 논둑길에는 분홍, 하양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고추잠자리와 말잠자리가 날았고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다. 나는 추수 끝난 논 여기저기에 세워진 볏가리에서 곧잘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고 집에 오면 옷에 짧은 짚 부스러기가 붙어 까슬거렸다. 1학년 2학기, 빨간 옷을 입은 여자만 잡아가 죽인다는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 수원시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기 전까지 나는 그 길을 따라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했다. 오전반과 오후반.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시간대를 달리 해서 정직하게 그 길을 왔다 갔다 했다.
사실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버스도 버스였지만 조금만 다리 고생을 해 버스비를 아끼면 맛있는 ‘깐도리’ 아이스케키를 사 먹을 수 있다는 게 그 길을 걸어 다니는 가장 큰 이유였다. 1986년 당시 국민학생 버스비는 60원이었다. 50원짜리 한 장과 10원짜리 한 장을 짤짤거리며 교문 밖을 나오면 교문 밑 더하기문구사에서 깐도리 아이스케키를 사고도 10원이 남았다. 10원으로는 불량식품을 사 먹었다. 길쭉한 사각의 깐도리. ‘비비빅’보다는 좀 더 가볍고 부드러운 팥 맛이 나는 깐도리. 잘 깨물어지고 가격도 착한 깐도리.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5분도 안 돼 입속으로 사라질 단맛을 위해 나는 기꺼이 7월 땡볕에도 30여 분을 넘게 걸었다.
등굣길, 논길이 다 지나면 원천리천이 흐르는 마을이 나왔다. 원천리천을 사이에 두고 우리 동네로 이어지는 논길과 매원국민학교로 가는 길이 위아래로 나뉘었다. 그러나 집중 호우 때면 원천리천이 불어 그 길에 넘쳐흘렀다. 징검다리와 경사진 사잇길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잠겼을 때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뛰어 울고만 있었다. 저쪽 길로 올라가야 집에 갈 수 있는데, 버스비도 없는데 당장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기적처럼 한 아저씨가 나타나 건너다 주냐며 무심히 물었다. 나를 번쩍 안고는 그 센 물살을 휘적휘적 거슬러 위쪽으로 옮겨 주었다. 나는 너무 고마워 더 크게 울었다. 몇 번을 인사하며 "고맙습니다." 했다.
생각해 보면 매원국민학교에는 여러 계층의 아이들이 있었다. 삼성전자 사무직 과장의 아들부터 삼성전기 라디오 조립공의 딸, 삼성전자 협력 업체의 자녀들과 역시 삼성전자 앞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아들딸, 원천유원지에서 물풍선 맞히기나 인형 맞히기 가게를 하는 집의 아이들, 날품팔이 노동자의 아들딸, 원천리천에 사글셋방을 성냥갑처럼 지어 임대업을 하는 집주인의 아들,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부모의 아이들, 논농사와 밭농사를 하는 농부의 아들딸, 비닐하우스에서 안개꽃이나 장미를 재배하던 원예업자의 아들, 주산·속셈 학원을 다니던 구매탄아파트 아이들, 중견 기업을 경영하는 어엿한 기업인의 아들 등.
입성과 얼굴빛, 메고 다니는 가방 등으로 그 애들은 각자 자기가 누군지 증명했다. 주로 전자 앞에서 장사를 하던 집 아이들과 친구였던 나는 학교를 가면서 친구가 이따금씩 바뀌었다. 처음엔 원천리천 아래에 살던 태희였다가, 원천리천 사글셋방에 살면서 여름이면 수해를 입어 학교에서 쌀과 보조금을 받던 유정이기도 했다가, 비닐하우스에 장판을 깔고 티브이와 냉장고를 놓고 사는, 나로서 별나라 아이로 느껴졌던 미선이기도 했고, 군고구마와 계란토스트를 늘 간식으로 싸 오는 말통골 사는 명희이기도 했고, 그 시절 집에 피아노가 있고 공부를 잘하는 민경이기도 했다.
29번 버스의 매원국민학교 전 정거장은 원천유원지였는데 그곳은 자연농원이 에버랜드가 되기 전까지 수원의 대표적인 위락 시설 단지였다. 원천저수지 중앙쯤에는 뜬 다리가 길게 놓여 있었고 그 다릴 건너가면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장식된 ‘용궁’이라는 음식점 겸 술집이 번쩍거렸다. 그 양옆으로 오리배들이 둥둥 떠 있고 높은 저수지 둑에는 길게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수지 뒤편으론 야산이 있었고 그 아래쯤에는 솔숲이 우거진 작은 쉼터도 있었다. 모처럼 소풍이라도 가면 우리 다섯 식구는 주로 거기서 불고기 도시락을 먹었다. 65번 버스는 원천유원지가 종점이었는데 입구부터 그 버스 종점까지는 좀 많이 걸어야 했다. 입구에 이르는, 그 긴 길에는 공기총 인형 맞히기, 사람 모형 패널에 물풍선 맞히기, 원반에 화살 맞히기 등을 하는 가게와 번데기나 아이스크림콘을 파는 노점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호객 행위를 했다.
서울에서 놀러 온 큰이모네, 작은이모네와 같이 유원지에 놀러간 어린이날, 나는 같은 반 친구 은철이를 만났다. 얼굴이 희고 귀공자처럼 생겼던 그 애가 인형 맞히기 앞에 서서 손님을 대하는 걸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그 남자애가 혼자서 가게를 보는 것도 놀라웠지만 아무렇지 않게 “열 번 쏘는 데 2천원이요.” 할 때는 마음이 이상했다. 저애를 내일 학교에서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이 돼 머릿속이 복잡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보이는 걸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던 것 같다.
원천유원지에서는 꼭 6월 6일 현충일에 익사 사고가 났다. 매원국민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마치 짠 것처럼 매해 몇 명씩. 그래서 현충일 전날 종래 시간이면 늘 담임선생님이 원천유원지엔 물귀신이 사니 웅덩이 같은 데 가서 놀지 말라고 누구나 욀 정도로 당부하셨는데, 신기하게도 그게 사실이라도 되는 듯 다음 날 등교를 하면 몇 학년 몇 반 누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원천유원지는 내게 공포인 동시에 가족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꿈의 장소였고 생계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했으며, 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점점 더 그곳은 번화했고 광교 신도시가 조성되기 전 90년대 초반까지 호텔과 모텔이 저수지 뒤쪽으로 빼곡히 들어선, 수원에선 보기 드문 관광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