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개념은 선천적으로 타고난다.’에 한 표.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일찌감치 낙제였다. 국민학교 시절, 내 첫 번째 시련은 ‘받아내림’ 산수 시간으로 왔다. 2학년 박대희 선생님은 이미 몇 해 전 오빠의 담임 선생님이기도 해서 내 이름을 직접 부르기보다는 ‘일수 동생’이라고 부를 때가 더 많았다.
열심히 받아내림에 대해 설명을 하다 갑자기 나를 호명하셨다. “거기 일수 동생, 나와서 이거 풀어 봐.” 쥐구멍이 있다면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도 이해를 못 한 터였다. 일의 자리의 위 수가 아래 수보다 작으면 십의 자리에서 10을 빌려와 일의 자리의 아래 수를 빼고 위 수를 더해 값을 적고, 십의 자리 수는 1을 빼서 적으면 된다는 계산법이었다. 그렇게 빼고 더하고 다시 빼야 하는 이유와 원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방식만 잠깐 듣다 나온 나는, 칠판 앞에 선 내내 울고 싶었다. 아, 왜 하필 나를. 애꿎은 오빠만 원망스러웠다. 오빠는 수학 천재였다. 나는 수학 둔재에 낙제였다. 이미 여러 번의 월말 평가로 선생님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난 더 억울했다. 그게 나를 위한 관심과 배려의 표현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어서 풀고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그러나 나는 빼고 더하고 다시 빼는 순서가 꼬여 어떻게 그런 값이 나오는지도 모르게 이상한 답을 적었다. 그것도 여러 번, 똑같이, 계속. 급기야 선생님은 “아니이~ 몇 번을 설명해. 그게 아니고! 일의 자리의 위 수가 아래 수보다 크냐 작으냐. 그럼 어떻게 한다고? 그다음에 어떻게 한다고? 그럼 십의 자리 수는 어떻게 되냔 말이다.”
산수 시간이 꼬박 지나 수업을 마치는 종이 ‘따라리라 따라리리라~’ 울릴 때까지 나는 한 번도 제 답을 적어 내지 못했다. 수학에 대한 공포증, 수학이라면 본능적으로 들던 거부감은 이미 그때 형성되었는지 모른다. 반 아이들은 계속 틀리는 나를 보고 한숨을 쉬기도 하다가 선생님과 같이 “아니이~”를 합창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은 방망이질 쳤고 화장실이 가고 싶을 만큼 초조하기만 했다. 어서 이 시간이 끝났으면, 어서 내 자리로 돌아갔으면 그 생각뿐이었다. 분필을 잡은 두 손가락에선 식은땀이 흘렀고 여러 번 분필을 부러뜨리기도 했다. 그러다 종이 치기 불과 몇 분 전 나는 그제야 계산법을 체득했다. 비록 마지막까지 틀린 값을 적었지만 나는 속으로 알았다. ‘아 이렇게 푸는 거구나.’ 하고. ‘바보, 이걸 한 시간이나.’ 하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식은땀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