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래미와 상은유치원

by 어슴푸레

1.

화사한 꽃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선물이라도 받으면 입꼬리는 절로 벌어진다. 그러나 내겐 꽃이 극도로 싫었던 적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나만 흘깃거리는 것 같았던 1986년 2월의 상은유치원 졸업식. 그날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춥고 아픈 날이었다.


2.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유치원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 대신 ‘유아원’이라는 게 존재했다. 오빠가 졸업했고, 나는 1년을 채 다니지 못한 ‘새마을유아원.’ 집에서 유아원까지 여섯 살 여자애가 걸어 다니기엔 물리적 거리도, 길의 상태도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비가 오면 길바닥은 온통 진흙탕이 되어 신발창은 흙 범벅이 되기 일쑤였고 장마가 계속될 땐 뻣뻣하고 냄새나는, 노란 비옷을 입기도 벗기도 불편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색깔까지 맞춘 노란 장화를 신고 다니긴 했지만 어기적어기적, 통당퉁당 걸어야 하는 산드래미 그 길은 멀고도 멀었다. 결국 나는 유아원에 안 간다고 드러누웠고 몇 차례 설득에 지친 엄마는 새로 생긴 신식, ‘상은유치원’에 나를 입학시켰다.


3.

준석이, 진희. 그 애들과 나는 노란 승합차를 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은유치원, 상은유치원. 차-악하고 귀여운 우리들의 꽃동산.”을 흥얼거리며 2년 가까이 등하원을 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아~ 그랬구나.” 했다. 내가 수업은 딴전으로 하고, 아픈 사슴반 동생을 챙기고 있어도 “너는 참 착하구나.” 오히려 칭찬만 들었다. 시간 내 완성되지 못한 채 유아원 교실 뒷벽에 전시된 포도송이와 공작을 본 엄마는 학부모 참관 학습이 끝나고 집에 오는 내내 화난 표정이었다. 나는 ‘만들기 시간’이 싫었다. 솜씨도 순발력도 창의력도 없는 내가 흰 도화지나 색종이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몰라 난감했다. 겨우겨우 친구들이 하는 걸 건너다보아도 도저히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유아원과 유치원은 공기부터 달랐다.


4.

유치원에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현충원에 가서 국립묘지 참배도 하고 가을이면 원 소유의 농장에 가서 매년 ‘밤 줍기 대회’도 열었다. 엄마는 그 대회에서 당당히 대상을 탔다. 두 가마 가득 불룩하게 밤을 턴 엄마는 젊고도 강인했다. 엄마는 열심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허투루라는 게 없었다. 그런 엄마가 나는 무서우면서도 자랑스러웠고 좋으면서도 두려웠다. 그 시절 엄마의 무게를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설프게 철이 들었고 눈치라는 걸 그렇게 배워 갔다.


5.

유치원에서는 모든 게 즐거웠다. 그게 자본의 힘 덕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상은’이 박힌 노란 모자는 커다란 계란과자 같았고 보고 있으면 고소한 기분이 들었다. 보자기처럼 둘러쓰게 돼 있던 노란 원복은 언제라도 우리를 작은 병아리로 만들어 주었다.

음력 2월생이라 매년 생일이 3월 중 오락가락했지만 유치원에서는 그냥 2월에 양력 생일자와 한데 모아 생일파티를 열어 주었다. 생크림케이크라는 게 없던 시절, 익숙한 베이지색 버터크림케이크가 아닌 광택이 도는 초코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는 건 참 신나는 일이었다. 설탕으로 만들어진 분홍 장미꽃과 연두색 꽃잎은 딱딱하고 아무 맛도 없었지만, 아무 맛이라도 날까 열심히 입안에서 굴리기도 했지만, 결국 ‘에이.’ 하고 씹어버리거나 뱉어버리기도 했다. 사탕은 겨우 몇 개쯤 매달고 부채 접듯 휴지를 접어 나비 모양으로 연결한 목걸이를 생일 때마다 목에 걸었으며 머리엔 족두리를 썼고 번쩍번쩍 겨울 한복을 입었다. 그때는 왜 꼭 화장을 해 보내라고 했는지 과한 볼터치로 얼어 터진 것처럼 보이는 두 뺨은 그야말로 ‘볼 빨간’이었고 입술은 새빨갛기만 할 뿐 예쁘지가 않았다. “우리 친구, 무슨 노래할까요?” 원장 선생님이 허리를 굽혀 내 눈을 마주치며 물어 올 때 나는 끈질기게도 그 시선을 피했다. ‘테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은 어린 내가 생각해도 이미 너무 울궈먹은 레퍼토리였다.


6.

겨울 하면 내겐 추운 이미지뿐이다. 별로 즐거웠던 기억이 없다. 추위를 많이 타서 추운 건지 추워서 추위를 많이 타는 건지 모르지만 겨울은 늘 벌판에 혼자 서서 오도 가도 못하는, 집 잃은 아이의 마음 같았다.

7.

사람들은 투명한 포장 비닐이 잿빛으로 변할 만큼 먼지가 낀 상태의 꽃다발을 들어 본 적이 있을까. 가장 빛나야 할, 인생의 첫 번째 통과를 축하하는 졸업식에서 한복은 총천연색으로 떨쳐입고 추레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나마도 몇 송이 되지 않는, 몇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분홍색 튤립 꽃다발을 안아 본 적이 있을까. 서너 송이쯤 들어 있던 꽃다발이었지만 식이 끝나고 보니 개중에는 뎅겅, 목이 잘려 나간 것도 있었다. 집에 카메라가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도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각도를 달리 하고 서 있던 누군가의 사진 속에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든 채 영원히 박제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식 시작 두어 시간부터 걷고 걸어 우만동 큰외숙 댁에 가서 꽃다발을 빌렸던 기억. 밥도 굶고 바람을 뚫고 어찌어찌 졸업식장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귀티 흐르던 사슴반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 큰외숙 댁 티브이 위쪽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시대를 앞선 드라이플라워’라고 해도 좋았을 튤립 꽃다발.


그날을 네 살이었던 남동생은 기억조차 못 할 수도 있다. 엄마는 그날을 일부러 잊으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절대 그 긴 하루를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다. 까만 졸업식 가운을 벗고 자주색 토끼털 잠바로 갈아입고 뚝뚝 운동화 앞코로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며 엄마 뒤를 따라 걷던 여자아이. “안녕히 계세요.” 하고 도망치듯 식장을 나왔던 그날의 기억.


그렇게까지 가난했을까 싶기도 한, 그렇게까지 아꼈어야 했을까 싶기도 한, 1986년 2월의 제1회 상은유치원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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