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앞 양복점집 딸

by 어슴푸레


우리 동네 사람들은, 아니 수원 사람들은 ‘삼성전자’를 ‘전자’라고 줄여서 불렀다. 택시를 타고 “전자 앞으로 갑시다.” 하면 기사들도 더 묻지 않았고 척척 우리 동네로 내려 주었다. 나는 전자 앞 일신라사의 둘째, 그것도 고명딸이었다. 떡국의 고명과도 같은, 나물이나 요리에 없으면 심심하다는 뜻에서 일렀을 ‘고명딸’, ‘양념딸’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존재감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당시 양복점을 하던 아버지는 그야말로 폼이 났고 멋쟁이셨다. 흰색, 엷은 하늘색, 여리여리한 분홍색의 와이셔츠를 때에 따라 바꿔 입었고 늘 칼주름 기지 바지에 구두를 신고 계셨다. 머리는 주로 장발이었다. 황토색 골판지 무늬의 얇은 재단지가 숯 색깔 재단 가위로 잘릴 때 서걱서걱 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저 종이 옷본이 옷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아버지가 얌전히 말린 양복지를 널찍한 재단대에 힘주어 굴리면 양복감이 뚜르르 펼쳐졌다. 그러고 나서 옷본을 따라 드문드문 고정된 시침핀에 눈을 주고 마름질을 했다. 재단 가위는 네 손가락을 넣고 쥐는 부분이 반달 모양으로 길쭉했고 엄지를 끼우는 부분은 둘레에 무명천이 감싸진 채로 손때를 타 누렜다. 어린 내가 들기엔 몹시도 무겁고 커다랗던 잠자리표 가위. 그 가위로 아버지는 이따금씩 내 앞머리를 똑바로 잘라 주셨다. 아주 꼬마 땐 대부분이 그 머리였다. 목을 오린 신문지를 둘러쓰고 눈을 질끈 감고 있으면 이마 위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똑똑똑 가윗날이 움직였다. 가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 날은 잠이 왔고 어떤 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소 여물을 썰다 시퍼런 작두날에 손끝이 잘렸다는 아버지의 왼쪽 집게손가락이 나는 아프고 애처로웠다.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밤이면 매일같이 통닭을 사 오셨다. 나는 아버지 무릎에 앉아 매일매일 닭 한 마리를 혼자 다 먹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허허, 고것 참.” 하셨다. 가마솥 통닭은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둘도 없는 ‘고명딸’이자 ‘양념딸’이었다.


양복점에는 두어 대의 미싱이 있었다. 요구르트 빛깔의 미싱과 까맣고 윤이 나며 날렵한 곡선의 미싱. 둘 다 오른쪽에 톱니 모양의 돌림바퀴가 달려 있었다. 미싱대 밑에는 어김없이 노란 미싱기름이 놓여 있었다. 케첩통 반만 한 크기였고 불투명한 용기에 담겨 있었다. 일손이 바쁠 때면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가 미싱 발판을 굴렀고, 마법처럼 바짓단에 오버로크가 박혔다. 나는 심심할 때마다 미싱대 위에서 실이 감긴 북과 구멍이 뽕뽕 뚫린 도넛 모양의 2단 북집을 가지고 놀았다. 필름통처럼 생긴 북패를 굴리다가 실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기도 했다. 가위질하고 남은 자투리 재단지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종종 아버지는 자투리 종이들을 묶어 공책처럼 만들어 주기도 했고, 모았다가 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손으로 열심히 비벼 부드럽게 해서 휴지 대신 쓰라고 쥐여 주시기도 했다.


나는 양복감의 색색깔 견본이 조그맣게 붙어 있는 카탈로그를 넘기며 맘에 드는 색과 무늬를 고르는 것이 좋았다. 남색, 검은색, 진회색, 갈색 등의 평범한 색깔부터 베이지색, 청록색, 체크무늬 등 실제 양복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양복지들. 옷감에 따라 울을 뜻하는 마크가 찍힌 것도 있었다. 하늘거려야 마땅할 공주님 옷감이 견본에 없어 속상했다. 아버지는 오빠가 중학교에 갈 때 교복을 직접 지어 주셨다. 줄자로 오빠의 가슴둘레와 어깨선을 재는 아버지는 역시나 멋있었고 오른쪽 귀 위로 살짝 비껴 끼워진 연필은 아버지를 훨씬 돋보이게 했다. 아버지는 친절하고 성실하며 공짜로 바짓단을 줄여 주기로 소문 난, 전자 앞 양복장이였다.


일신라사가 소문이 나면서 아버지는 점점 더 바빠졌다. 태일이 오빠나 상두 삼촌을 데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가봉 날짜를 맞추기 위해 안채엔 조그마한 양복 재단실을 만들었고 주로 명절을 전후로 밤새 불을 밝혔다. 나는 겨울에 귤과 암바사를 들고 그 재단실에 자주 놀러 갔다. 삼촌들은 그런 나를 예뻐해 주었다.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손님이 주문한 양복지를 끊으러 나를 데리고 영동시장에 갔다. 급기야 여섯 살쯤엔가 영동시장에서 나는 엄마를 잃어버렸고 29번 버스가 다니던 길을 되짚어 아버지의 양복점에 걷고 또 걸어서 왔다. 6km가 넘는 거리였다. 두어 시간 동안 아이를 잃어버려 혼이 쏙 빠진 엄마는 혼자 걸어 왔더라는 아버지의 전화 통화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했다. 전자 앞에서 나는 점점 명물이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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