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더위가 시작될 무렵이면 동네 골목에 채송화와 봉숭아꽃이 소담히 피었다. 술래잡기나 소꿉장난을 하다 하나둘 저녁 먹으러 자릴 뜨려고 하면 어김없이 이래도 갈 거냐고 분꽃이 피었다. 아직 다 피지 않은 건 길쭉하고 작은 나팔 모양이었고, 활짝 핀 건 눈이 아플 만큼 붉디붉었다. 꽃대를 똑 따서 까만 씨 부분을 잡고 살살 늘이면 흰 실 같은 줄기가 나왔다. 조심조심 집어서 빠지지 않게 귓구멍에 기술적으로 끼우면 양쪽 귀에서 대롱거리던 분꽃 귀걸이. 뛰거나 심하게 움직이면 바로 빠졌기에 귀걸이를 하면 공주 걸음을 하고 사뿐사뿐 걸어야만 했다. 그렇게 마지막 공주 걸음을 끝으로 집에 들어가곤 했다.
다음 날 오후 윤경이의 손톱이 너무 빨갛다. 미용실에서 공짜로 바를 수 있던 매니큐어와는 완전 다르다. 무섭도록 빨간 저 색깔은 뭐지. 자꾸만 마음이 빼앗긴다. 이것도 모르냐는 듯이 그애는 '봉숭아물'이란다. 봉숭아물? 봉숭아에 저런 예쁜 색깔의 물이 들어 있다고? 어떻게 하는 거지? 지천에 피어 있는 봉숭아. 내 손톱 색도 저렇게 할 수 있는 건가. 봉숭아꽃 색깔이 다 다른데 흰 꽃으로 하면 흰색이 되려나. 궁금한 것 투성이였지만 윤경이는 말해 주지 않았다.
잔뜩 뾰로통해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우리 강아지, 왜 뿔이 났냐고 외할머니가 가만히 묻는다.
"할머니. 봉숭아 물들이기 할 줄 아세요?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할머니는 허리춤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신다.
"휭허니 약방 가서 백분 사온나."
"백분? 백분이 뭐예요?"
"봉숭아물 디린다고 하믄 줄 꺼시다. 갔다 온나."
백분이 백반이라는 것, 갈색과 베이지색으로 된 네모 상자의 '명반'과 같다는 것을 나는 알 리가 없었다. 이게 맞나 갸우뚱하며 안채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그사이, 마늘을 찧는 작은 절굿공이와 절구. 까만 비닐봉지, 가위, 흰 무명실, 길쭉한 봉숭아잎과 흰색, 분홍색, 자주색 봉숭아꽃을 마루 위에 준비해 놓고 계셨다. 까만 비닐봉지를 세로로 세 번 접고 다시 가로로 네 번 접어 생긴 선을 따라 가위질을 했다. 반듯한 까만 네모 비닐을 옆에 놓고 절굿공이에 봉숭아잎과 꽃을 넣고 콩콩콩콩, 콩콩콩콩 오래도록 찧었다. 다 이겨져 까만 죽처럼 될 때까지. 중간중간에 가느다란 심이 보이면 또 콩콩콩콩, 콩콩콩콩 찧었다. 사 온 백분을 쪼개 공이에 넣고 다시 콩콩콩콩, 콩콩콩콩.
갑자기 시큼한 냄새가 났다. 으으으, 저 까만 곤죽이 그토록 빨간색을 만들어 준다고? 정말? 저엉말?
할머니는 그 곤죽을 손가락으로 뭉쳐 내 열 손톱 위에 가만히 올렸다. 그리고 까만 네모 비닐을 뒷손가락에서 앞손가락으로 둘러 위아래를 반듯이 접은 다음 무명실로 칭칭 감아 묶으셨다.
"아프냐?"
조금 저렸지만 예뻐진다는데 뭐 이 정도는. "아뇨 할머니.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돼요?"
연하게 들이려면 네 시간쯤, 진하게 들이고 싶으면 이대로 자서 내일 아침에나 풀러야 한단다.
아아아. 사방팔방 굴러다니며 자는 내가 이 불편한 걸 하고 잘 수 있을까. 다 빠져 버리면 어쩌나. 그래도 윤경이 손톱처럼 새빨갈 수 있다면 아니 그보다 더 빨갈 수 있다면 그 정도야 뭐. "네 할머니. 아침까지 안 풀래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쪼골쪼골해진 손가락 마디에 1차 기함을. 열 손가락 양옆이 탄 것처럼 까매진 것에 2차 기함을. 무사히 열 손톱 위에 안착해서 마녀 손톱만큼이나 쨍하게 뽑힌 봉숭아물 색깔에 3차 기함을 했다. 진한 오렌지빛에 가까운 봉숭아물과 물기가 날아간 까만 곤죽, 희미한 백반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외할머니는 내게 초여름 봉숭아물을 들일 때쯤 여지없이 찾아오신다. 인정 많은 우리 외손녀. 잘 살고 있느냐고. 이제 봉숭아물쯤은 혼자서도 잘 들이지 않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