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자수(刺繡)

by 어슴푸레

촘촘히 짜인 까만 카디건에 오색(五色)의 자수(刺繡)를 놓고 있는 엄마. 칸칸이 커다란 장미 문양이 그려진 갈색 장판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기계적으로 수편물을 뜨고 있는 엄마. 비닐 장판에 핀 꽃처럼 1984년에 박힌, 고단한 자수 같은 엄마.


엄마는 한시도 쉬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양복점을 하던 시절엔 동네 아주머니들과 공동 마당에 나와 수를 놓았다. 그때 엄마가 웃고 있었는지, 무심히 바늘만 움직이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슬레이트 지붕, 플라스틱 물받이 아래에 사각 나무 의자를 내놓고 조용히 꽃이나 나비를 수놓는, 삐쩍 마른 엄마의 모습만이 손에 잡힐 듯하다.

아버지는 엄마가 부업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셨다. 살림이 빠듯하긴 해도 아직까지 다섯 식구 밥 굶기지 않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거였다. 그건 어쩌면 당신 벌이에 대한 어머니의 소리 없는 채근이라 여긴 ‘발끈’인지 몰랐다. 엄마의 수놓는 모습이 오래가지 않았던 건 그런 아버지의 위신을 고분고분 세워 주기 위함인지, 당시 보세옷 자수가 살림에 보탬이 될 거란 기대와 다르게 재료비 대비 공임비가 말도 안 돼 일찌감치 접은 이유인 건지, 약삭빠른 하청업주가 자수만 받고 날아 버린 때문인지 여섯 살의 나도, 마흔네 살의 나도 알 도리가 없다.

바야흐로 기성복 시대가 오면서 더 이상 양복점으로는 세 아이의 교육은커녕 생계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일이 년의 시간을 두고 양복점에서 양품점으로 업종을 변경하셨다. 그 과정 중에 아버지와 엄마가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시기가 존재했다. 나는 두 분이 나란히 옆 가게에서 일을 하시는 모습을 가게 앞 흙바닥에서 서울 식당 윤경이와 ‘1234’를 하며 통유리로 넘겨다보는 일이 좋았다. 아버지가 양복점에서 누런 줄무늬 재단지에 곡자를 대고 초크질을 할 때, 엄마는 양품점에서 ‘니들포인트’나 ‘국제 자수’ 같은 것을 놓느라 늘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마법처럼 엄마의 손에서 ‘일심(一心)’, ‘노을’ 같은 작품이 완성되면 곧 표구가 되어 양품점 쇼윈도에 차례로 걸렸다. 그 표구는 삼성 전자 여공에게 보내는 자수 키트 광고인 동시에 엄마의 작품전 같았다.


엄마에게 자수는 그 시절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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