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양보에 대하여

by 어슴푸레

철이 들었다는 것과 매번 손해를 봐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같은 말인지 모른다.

빤한 살림에 아이 셋을 키우기란 쉽지 않았을 거다. 열한 살 딸이 보기에도 두 분의 삶은 팍팍했다.


거의 자정까지 양품점 장사를 하고, 새벽 2시쯤 총알택시를 타고 동대문 평화시장에 날아가서 물건을 도매로 떼고, 그 많은 짐을 이고 지고 1호선 첫 차를 타거나 ‘따따불’을 줘 가며 총알택시를 잡아타고 아침이 되어서야 수원으로 오신다는 것을 어린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두 분은 곰 인형, 액세서리, 화장품, 옷가지, 넥타이, 신발, 인테리어 소품, 비키니 옷장, 벽시계 등을 겹겹이 싼, 거대 비닐봉지들을 급한 대로 가게에 끌어다 놓은 후에야 부족한 잠을 청하러 안채로 들어오셨다. 겨우 세 시간을 눈 붙이고 10시가 넘어 늦은 아침을 한술 뜨시곤 했다.


오빠나 동생과 소풍날이 같으면 내 몫의 김밥이 있었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나만 소풍 가는 날은 사정이 달랐다.


“김밥 싸 줄까, 좋아하는 계란 후라이 올려 줄까?” 선택지의 정답이 후자라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새벽 내 물건 떼고 걷고 뛰었을 엄마에게 차마 그 꿀 같은 잠을 포기해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계란 후라이!” “정말 괜찮겠어?” “응 괜찮아, 엄마. 나 계란 좋아하잖아.” 열한 살 딸은 엄마의 맘을 편하게 해 주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도시락을 등굣길 까마중 풀숲에 숨겨 놓고 소풍을 갔다. ‘계란 후라이 도시락’은 열한 살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소풍 도시락이 아니었다. 너무 성의 없어 아이들의 시선을 받는 도시락보다 깜빡 잊고 도시락을 두고 왔다고 말하는 편이 덜 창피할 것 같았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나를 정말로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소풍날에 김밥도 못 싸 오는 아이.’라는 표정으로. 그날은 내 삶에 영영 잊히지 않는 몇 날 중 하나가 되었다.


드디어 살림이 펴 가끔 외식을 하거나, 졸업을 기념하기 위해 밥 먹으러 가는 장소가 ‘갈빗집’이 되었을 때에도 나는 ‘삼부자갈비’와 ‘좋은 소고기 사다가 양념에 재운 엄마표 소불고기’ 중에서 기꺼이 후자를 택했다. ‘전기 쿠커에 자박자박 달큰하게 구워지는 엄마표 소고기가 더 맛있어서.’라는 내 나름의 기특한 이유를 댔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었을 때 오빠는 대학생이었고, 남동생은 예비 중학생이었다. 세 자녀의 등록금과 두 아이의 교복값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때 엄마는 ‘교차로’의 ‘교복 헌 옷 팝니다.’를 보고 계셨다. 판매자는 동우여고 예비 졸업생 부모였다. 동하복 교복, 동하복 체육복, 코트를 한 큐에 해결할 수 있었고 3년을 썼으니 거의 헐값이었다.


나는 엄마와 직접 장안동 그 집에 교복을 사러 갔지만, 그 교복의 상태를 보고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결코 괜찮지 않았지만 왜 동생은 교복을 맞춰 주면서 나는 헌 옷을 입어야 하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착한 딸’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나는 중학교 교복은 ‘스마트’에서 때깔 나게 맞춰 입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조금은 서러웠던 것 같다.


이쯤 되면 물욕(物慾)이 있을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물건에 대해 별 미련이 없다. 꼭 뭐가 갖고 싶다거나 저건 반드시 사야 한다는 게 없다. 초월해 버렸다고 하기엔 내가 좀 가여운 면도 없지 않다. 그냥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라 체득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차림에 대하여 남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랬던 내가 딸애를 키우면서 중심을 잃고 있다. “엄마 나 이거.”라고 말하면 아이가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응. 그래.”라며 백이면 백, 다 사 주는 것이다. 대부분 반짝이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들이다. 구두, 치마, 반지, 목걸이, 머리핀, 샌들, 가방 같은. 내 눈에 예쁜데 다섯 살 딸애에게 안 예쁠 리 없다. 딸애는 그것들을 보고 “엄마 아름다워!”를 연발한다.


맘에 드는 물건의 하필 딱 그 사이즈가 동나 버렸을 때 딸애는 울고불고 떼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맘이 약해져서 어쩔 줄을 모른다. 어떻게든 사 주고 싶다. 재고가 있는 매장을 점원에게 알아보고 한 시간이 걸려서라도 기어이 그것을 손에 쥐여 준다.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미 습관이 돼 가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그렇게 원하는 물건을 따박따박 사 주는 것은, 어린 시절 내가 가질 수 없던 것들을 딸을 통해 보상받고 대리 만족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나는 열한 살에서 결국 1cm도 크지 못했다.


엄마에게 장사와 육아에서 그나마 손을 더는 일은 육아였기에 엄마로서는 늘 최선책을 찾았다는 걸 언제나처럼 잘 이해한다. 머리 빗겨 묶어 줄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빴던 엄마이기에 나는 초등학교 내내 상고머리, 커트머리를 전전해야 했다. 그럼에도 언젠가 머리를 기르면 꼭 예쁜 머리방울을 달아야겠다는 마음에 용돈이 생길 때마다 온갖 종류의 머리핀과 고무줄을 모으고 또 모았다.


열세 살, 드디어 반커트가 단발로 넘어가던 그때, 나는 그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학교에 갔고 또 한 번 아이들의 비웃음을 샀다. 비로소 나는 알았다. 나의 순수한 욕망이 타인에게는 괴상한, 조금도 이해받을 수 없는 몰취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속 깊음과 비자발적 양보의 사이.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

치 결핍이 내 우성 유전자라도 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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