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90점은 넘는다는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애석하게도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항변하자면 그건 다 깜빡하고 챙겨 넣지 않은 필통 때문이었다. 어릴 때 꽤 덤벙거렸다. 빼빼 말라 키만 멀대같이 컸던 나는 고무줄놀이가 그렇게 좋았다. 폴짝폴짝 ‘월화수목금토일’을 7단까지 뛸 때, ‘장난감 기차가 칙칙 떠나간다. 과자와 사탕을 싣고서.’ 노래처럼 경쾌하고 사랑스럽게 고무줄놀이를 할 때 깃털처럼 사뿐사뿐 금을 밟았다 풀었다 넘었다 뛰었다. 아침부터 골목에서 아이들과 고무줄을 한바탕 뛰다가 후다닥 점심 먹고 오후반에 늦지 않게 학교에 갈 참이면 빡빡한 운동화 뒤축에 신 주걱을 넣느라 책가방을 꼼꼼히 챙길 정신이 없었다. 전날의 숙제와 알림장을 그제야 체크하고 서둘러 가방에 욱여넣고는 꼭 필통은 빠트렸고 학교에 가면 필통이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 그제야 눈앞에 보이는, 마루에 던져 둔 빨간색 자석 필통. 몇 번은 옆자리 친구가 연필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월말 시험이 있는 날은 “선생님, 필통 안 가져왔어요.” 말을 해도 “군인이 전쟁터에 총 안 가져가면 어떻게 되냐?” 하시며 연필을 전혀 빌려주시지 않았다. 꼭 시험 종료까지 10분이 채 남지 않아야 “옆 짝꿍이 친구 연필 좀 빌려줘라.” 하셨다. 그래서 내가 짝에게 다급한 눈짓을 보내면 그 애는 차갑게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싫어.” 했다. 그러다 종료 5분 전이니 답을 마지막으로 체크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들리면 그제야 “여기.” 하고 연필 한 자루를 내밀었다. 쫄아 붙은 마음에 문제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버젓이 밑줄이 그어진 “‘아닌’ 것은?”에 맞는 것을 적기도 하고, 원문자 숫자에는 맞게 동그라미를 쳐 넣고 답을 적는 소괄호엔 엉뚱한 번호를 적었다. “이제 그만. 시험지는 뒤에서 앞으로 넘긴다.”라고 할 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푼 것보다 풀지 않은 것이 더 많았고 그나마 푼 것도 맞은 것보다 틀린 것이 더 많았다. 시험 점수가 잘 나오려야 나올 수 없었다.
엄마는 이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필통을 빠트려서라고 하면 혼나도 보통 혼날 게 아니었다.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 난 머리가 나쁜 편을 택했다. 동네 아이들이 싸우면 앞장서 ‘누가 잘못했네, 누가 그렇게 말 안 했네.’ 제법 중재 비슷한 걸 하는 통에 “이 집 딸은 커서 변호사 되려나 봐.” 하는 서울식당 아줌마의 빈말로 더러 엄마를 기쁘게 한 적은 있었지만 1학년 때부터 나는 공부로는 별 재미를 볼 수 없다는 걸 직감처럼 알았다. 아무리 뛰고 날아 봐야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시험 성적은 점점 더 오빠와 격차를 벌렸다. 성적으로 오빠를 이겨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둘째는 확률적으로 혁명가가 많다는데 나는 깨끗이 학업 포기자의 길을 택했다.
그런 내게도 반전의 기회가 왔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글짓기 시간’이었다. 바른생활 짧은 글 짓기, 어버이날 부모님께 감사 편지 쓰기, 여름 방학 생활문 쓰기, 환경의 날 논설문 쓰기, 개교기념일 학교 사랑 백일장 등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들로부터 크고 작은 칭찬과 관심을 받았고 종종 상을 타기도 했다. 글짓기로는 오빠를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글짓기만이 특별할 것 없는, 키 큰 선머스마 같은 여자애를 특별하고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국민학교 3학년 여름 방학 숙제 중에 200자 원고지 5장 내외로 생활문 쓰기가 있었다. 나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 오빠에 대해 썼다. 요는 중학생 오빠가 자기 방에서 컴퓨터 게임만 하면서 엄마가 시킨 방 청소를 내가 하려 치면 “여기도 쓸어, 저기도 쓸어. 여기도 닦아, 저기도 닦아.” 한다는 내용의 글짓기였다. 당시 사춘기에 막 들어선 오빠는 예민하기도 예민했지만, 국민학교 3학년짜리 코찔찔이는 정말로 못 견뎌 했다. 자주 싸웠고 동생이 오빠한테 대든다며 부모님께 매번 일방적으로 혼났다. 오빠는 장남이어서 그게 뭐가 됐든 무사 통과였고 남동생은 막내라서 귀염을 받았다. 나는 고명딸임에도 불구하고 눈칫밥 신세였다. 그 글짓기 내용이 재미있었는지 개학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박소근 선생님께선 내 이름을 불러 교탁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별표가 다섯 개나 쳐진 그 생활문을 건네시며 소리 내 읽어 보라고 하셨다. 두근두근. 칠판 앞으로 나올 때의 여느 두근거림과는 좀 달랐다. 목소리가 많이 떨렸다. 울 것 같았지만 꾹 삼키며 최대한 재미있게 읽으려고 노력했다. 다 읽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반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날 보고 웃어 주었다. 그 원고지 뭉치를 들고 쭈뼛쭈뼛 자리에 앉을 때 충북통닭 인선이가 “재밌다. 잘 썼네.” 했다. 그때 처음 나는 글쓰기의 힘을 알았다. 글을 잘 쓰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조금 우러러본다는 것을.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호! 드디어 오빠를 이길 묘수가 생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