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사 아저씨와 한글 떼기

by 어슴푸레

아버지 양복점엔 갈색 서류 가방을 든 계몽사 아저씨가 잊을 만하면 들렀다. 아저씨 가방에서 나오던 명작 브로셔는 백이면 백,시선을 사로잡았다. 빳빳하고 석유 냄새가 나고 펼치면 두 눈이 즐거운, 올 컬러 브로셔. 난 글은 몰라도 그림을 보고 맘껏 공상하는 게 좋았다. 아저씨가 두고 간 종이를 오려 인형 놀이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너 혹시 글 읽을 줄 아니?"

"아뇨."

"아저씨랑 한글 배울래?"

"음... 자신 없는데요?"

"괜찮아. 해 보자."

"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아, 다음이 뭐였더라. 음.. 비슷하게 생겨서 소리도 비슷했는데...'

"모르겠어요."

"자, 차례대로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치읓, 키읔, 티읕, 피읖, 히읗!"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치읓......... 하...."

"되게 잘하는데, 아저씨는 이렇게 금방 배우는 애를 본 적이 없어. 치읓부터 다시. 치읓, 키읔, 티읕, 피읖, 히읗!"

"힝...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치읓. 흠.. 키역?티귿?피읍?히응?"

"짝짝짝. 와! 대단하다 너. 머리 되게 좋다. 모음도 금방 깨치겠는걸? 모음은 다음에 배울까?"

"아니에요! 지금 가르쳐 주세요!"

"좋아.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

"이젠 혼자 읽어 볼까?"

"네!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

"우와!! 어머니. 천재를 낳으셨네요. 따님, 한글 금방 떼겠는데요!"


엄마가 그날 바로 전집을 들인 건 아니었다.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지는 음절 구조에 다시 받침이 붙어 글자가 만들어지는 것까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아저씨가 돌아가고 나서 브로셔를 열심히 읽으려 애썼던 기억만 어렴풋하다. 그후로도 아저씨는 내게 한글을 가르쳐 준다며, 오빠에겐 위인전을 읽혀야 한다며, 국민학교 2학년 땐 물질과 물체가 어떻게 다르냐고 질문하고 내 대답이 영 시원찮자 <학습그림과학>이 좋다며, 3학년 땐가는 백과사전이 집에 한 질은 있어야 애들이 공부에 흥미가 붙는다며 꽤 정기적으로 판촉 방문을 했다. 손님이 양복을 맞추고 가봉을 해야 겨우 돈이 돌던 우리 집. 어린 내가 보기에도 계몽사 전집은 언감생심이었다.



소연이네 집엔 전집이 많았다. 윤경이네도 그랬다. 계몽사 전집이 없는 집이 없었다. 그애들 집에는 <소년 소녀 세계 문학 전집>도 있었고, <안데르센 동화 전집>도 있었다. 거실 책장에 꽂혀 있던 그 책들은 자체로 폼이 났다. 난 오빠의 위인전 말고 <디즈니 그림 명작>이 너무 갖고 싶었다. 텔레비전에서 해 주는 <세계 명작 만화> 말고, 내 '소유'의 전집이 있었으면 했다. 엄마한테 사 달라고 졸랐을까. 어느 날 엄마는 계몽사 아저씨에게 카드를 건네고 있었다. 아저씨가 신용 카드에 먹지를 대고 볼펜으로 살살살 긁자 연속된 숫자와 꼬부랑 글씨가 파랗게 나타났다. 금액을 확인한 엄마가 사인을 하자, 아저씨가 카드 전표를 북 떼서 엄마한테 주었다. "말씀하신 대로 36개월로 긁었습니다." 나는 36개월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 리 없는 철부지였다. 날아갈 듯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론 신났다. 그 책은 다름 아닌, <디즈니 그림 명작>이었다. 30권을 찢어질 때까지 봤다.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고. 한글을 다 깨치고 그 동화를 읽었는지, 그 동화를 집에 들여서 한글을 다 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보물인 양 애지중지했고, 윤경이나 소연이가 놀러와도 잘 보여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사 준 계몽사 전집은 사진 속의 <과목별 학습 백과사전>이었다. 별책으로 국어사전이 딸려 있었다. 금박의 사자가 책등 꼭대기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던 15권의 백과사전. 중학교 때까지 그 책은 유용했다. 중학교 1학년, 영어 깜지 숙제를 할 때 <영어>를 주로 뽑아서 공부했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별책 부록 <국어사전>을 이용해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았다. 가끔 내가 처음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한 게 언제였나 돌이켜 볼 때가 있다. 나는 한창 문학소녀였던 중학교 때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계몽사 디즈니 그림 명작>을 엄마가 사 준 직후였다. 어릴 때의 기억이 그것을 떠올려 주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국어사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 것도 <계몽사 과목별 학습 백과사전>의 별책 <국어사전>이 있어서였다. 지금 사전 밥을 먹고 있는 것, 그리고 글쓰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것 모두가 계몽사 전집 덕분이었다.


계몽사. 이름 하나는 참 잘 지은 출판사.

한글을 깨치고, 책을 읽을 줄 알고,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게 만들고, 국어사전을 가까이하게 한, 내겐 지극히 '사적인' 출판사.


문득, 계몽사 그 외판원 아저씨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망포리 작은엄마와 탕수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