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걸 못 뽑을지라도

-'뽑기' 예찬

by 어슴푸레

"어, 영권이네?"

"안녕하세요?"

"응. 영권이 많이 컸네. 아들은 영권이랑 가면 되겠다. 동생은 아직 등교 시간 멀었으니 엄마랑 천천히 갈게. 좋은 하루 돼!"


등굣길, 모처럼 만에 두 애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러다 큰애의 절친 영권이를 만났다. 애들 초등학교는 코로나 19 확산 금지 차원에서 학년별로 10여 분씩 시차를 두고 등교하게 하고 있다. 10분 늦게 등교하는 작은애가 오늘은 오빠랑 같이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큰애를 먼저 보내고 내가 작은애에게 속삭인다.


"오빠 횡단보도 건너면 엄마랑 저기 갈까?"

찡긋찡긋, 오케이?!

작은애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이게 웬일인가 한다. 아이의 들뜬 모습을 보니 덩달아 마음이 환해진다.


'저기'는 다름 아닌, '우리 동네 간식 창고'. 온갖 뽑기 기계가 입구에 위풍당당 서 있고, 안에는 아이스크림과 과자, 슬라임과 스퀴시 인형 등이 형형색색으로 가득한, 학교 인근에서 가장 핫한 가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애들 학교 앞엔 그 흔한 문방구가 없다. 그래서 이곳은 등교 시간 직전과 하원 시간 직후에 초등학생들로 복작복작한다.


"이거 사 주시면 안 돼요?"

미니어처 냉장고 놀이 세트다. 흠... 이걸 학교에 들려 보낼 순 없고, 둘 만의 비밀로 부치기엔 금방 뽀록날 게 뻔한 부피다.

"안 돼. 아빠한테 걸리면 엄마 혼나. 딴거 골라."

"힝. 그러면 이거 하나 사고, 뽑기 한 판 하면 안 돼요?"

"음... 뽑기 두 번 하는 게 어떨까. 너무 비싸다."

"힝... 알았어요."


그래, 너로 정했다! 작은애가 500원짜리 액세서리 뽑기와 1000원짜리 무드등 열쇠고리 뽑기 앞에 섰다. 나는 1000원짜리 두 장을 500원짜리 네 장으로 바꿔다 준다. 두근두근. 동전을 넣고 시계 방향으로 힘껏 돌렸는데, 내용물을 확인한 아이의 표정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 별로야?"

"힝. 고양이 무드등 뽑고 싶었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이히! 도넛 모양 반지가 너무 귀여워요."


하나는 맘에 들고, 또 하나는 별로란 얘기. 4학년 딸애의 손가락엔 다소 작은 싸구려 반진데도 아이는 좋은가 보다. 새끼손가락엔 작고, 약지손가락엔 끼고 싶지 않다며 아쉬운 대로 검지손가락에 낀다. 손가락 마디 하나를 넘지 못하고 반지가 걸려 버린다.

"다른 손가락에 끼우면 안 돼?"

"이 손가락이 좋아요. 안 잃어버릴게요. 고마워요 엄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환히 웃는 딸애를 보고 있자니 어쩜 이리도 맑을까 싶다.

저 건강한 웃음을 영원히 지켜 줄 수 있다면.


이런, 이런. 나 혼자 또 심각해졌다.


용돈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나는 별로 뽑기가 하고 싶지 않았다. 딱 한 번으로 결정되는 무시무시한 확률 게임에 겁부터 났다. 뽑기 기계에 그려진 예쁜 반지나 목걸이를 구경하는 게 더 좋았다. 그러다 친구들이 턱턱 그것들을 뽑아서 플라스틱통을 까고 신나하면 그제야 조금 부러웠다.


국민학교 뒷문 문방구엔 한 판에 50원 하는, '추억의 뽑기'가 있었다. 칸마다 별 모양이 그려진, 두꺼운 종이판이었다. 원하는 별에 손을 대고 잡아당기면 톡 하고 하나씩 종이가 떨어졌다. 두구두구~ 뭐가 나올까. 종이에 쓰인 내용에 따라 저마다 '별사탕', '쫀디기', '유리구슬', '반지' 등을 얻어 갔다. 난 좋은 걸 뽑아 본 적이 없다. '꽝' 아니면, '다음 기회에'. 기껏해야 '한 판 더.' 은박지와 습자지로 싸인 동그랗고 작은 캐러멜만 늘 걸렸다. 운이란 건 그때도 참 없었다. 친구들이 3짜는 돼 보이는 잉어 엿을 잘도 뽑는 동안, 나는 늘 동그란 엽전 모양의 '꽝'만 뽑았다. 쉬는 시간에 녹여 먹다 황급히 비닐에 싸서 책가방에 넣으면 그대로 책과 한 몸이 되어 쩍 들러붙었다. 뽑기에 대한 추억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원하는 걸 뽑지 못하는 게 더 많을 걸 알고 안 뽑는 것과, 그래도 기대하며 뽑는 것 중 무엇이 더 의미 있을까. 뽑는다는 행위는 결국 뭔가 시도함을 전제로 한다. 재미로 하는 뽑기라서 큰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무엇'을 뽑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잠시 웃기도 하고, 의기소침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을 뽑든, 내 손에 '무엇'을 쥔다는 것은 크든 작든 '무엇'을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럿이 뒤섞인 뽑기 기계로부터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나오게 할 때 우리는 셀레고 또 설렌다. '무엇'이 나오든, 그 결과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세팅돼 있든 '뽑기' 자체에는 누구나 한 번쯤 기대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런 까닭에 인형을 뽑고, 랜덤 박스를 뽑고, 캐릭터 플리퍼즈를 뽑고, 복권을 사고, 복권을 긁는다. 그 행위에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해도 크게 상관없다는 의연함이 제스처로 따라온다.


뭐 어때서? 이것도 좋은데, 뭐.

혹은

와, 기대 안 했는데. 이게 나왔네!


겨우 이 정도로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는데 뭐가 대수람.


이러다 매일 아침, 뽑기 기계 앞에 날 데리고가면 큰일인데. 괜한 일을 했나.

끙.

ㅜ.ㅜ


ps. '뽑기'가 국어사전에 없다. 누가 <우리말샘>에 등록 제안 좀 해 주세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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