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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아리 May 16. 2023

너는 나의 자랑이야

#친밀함과 깊음 사이의 어딘가

우산을 씌워줬던 남자 동기는 또 우산 필요할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번호를 줬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로 카카오톡은 추가가 되어 있었다. 같은 학번이다 보니 그랬겠지만. 


더 재미있는 건, 그달에 비가 정말 자주 왔다는 점이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그래서 정말로 그 애를 찾을 일이 많았다. 또 가끔은 그 애가 내게 우산을 씌워달라 부탁했다. 


강의도 시간이 겹치거나 같은 강의를 듣고 있는 게 많았기 때문에 그와 나는 곧잘 어울려 다니게 됐다. 같이 강의를 듣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친해지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당시까지만 해도 1 대 1 관계를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럿이 있을 때보다 신경을 더 써야 하니까. 


나는 개인주의가 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이, 심지어 가족조차 내 공간에 함부로 침입하는 꼴을 못 본다. 내 사적인 영역은 정말 '나'만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누구와도 터놓지 않고, 공유하지 않는. 


그렇다 보니 1 대 1의 관계에서도 나와 사이가 '친밀'해지는 것은 가능하지만, 깊어지는 것은 어렵다. 그런 점에 상처 입었던 친구들도 많았고, 나 역시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렇다고 그 태도를 바꿀 마음은 없었다.




 이유라고 한다면, 어린 시절의 성장 환경 때문일 확률이 높다. 나는 부모님의 영향과 여러 이유로 중심에 있을 때가 많았다. 관심이 전부 모여있는 지점에서 자라게 되면, 참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조금 더 빨리 겪게 된다.


그들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나쁜 사람도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는 이용하기 좋으니까. 


그리고 편을 들어 달라고 하는 경우도 커가면서 많이 생겼다. 이런 이유로 나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경험으로 깨우치게 됐다. 그리 아름다운 방식은 아니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일찍 잘 배워뒀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내게는 깊은 관계라는 게 마치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나 약한 부위에 잠재적 위험 요소를 배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모님 역시 나를 독립적으로 키웠기 때문에 나는 점점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살았다.


때로 나를 선망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 안에서 그 무엇도 꺼내지 않는 나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선망에 코웃음을 쳤고, 걱정에는 진저리를 냈다.


아마 그 남자 동기를 만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난 그렇게나 미성숙한 인간이었겠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남자 동기와 둘이서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 내용도 조금씩 사적으로 변했다. 나는 몹시 예민해서 조금만 깊게 질문이 들어와도 입을 닫고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어물쩍 웃어넘기거나 화제를 바꿨다. 


거기서 뭔가 더 시도했다면, 아마 나는 불편해서 도망갔을 테지만, 그 동기 남자애는 내 그런 반응에 언제나 넘어갔다. 그래서 조금씩 그 사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긴장이 줄고, 경계도 옅어졌다.


어느 날 같이 듣는 강의가 공강이 됐고, 그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길게 남아 있어서 우리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 오래 있으면 좀이 쑤시던 나였는데 그 사람과 3시간 넘게 수다를 떨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대학교 이야기 근처만을 돌면서 내가 불편해하는 주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채 3시간을 즐겁게 이야기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전까지는 그 누구와도 그랬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신기하게 여기며 빤히 쳐다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웃는다.



"왜 웃어?"



"내가 신기해?"



독심술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을 알아챈다.



"독심술 아니고. 전에는 뭔 표정인지 모르겠더니 요즘은 표정 보면 어떤 기분인지 좀 보여서."



감정 표현 자체는 솔직하게 하기 때문에 그리 이상한 소린 아니다. 언제나 모든 감정을 표정으로 표출하진 않지만, 조금 친밀한 관계에서는 표정 관리를 덜 하는 것도 맞으니까. 게다가 요즘 제일 자주, 오래 보는 사람인데. 그 정도 캐치가 어려운 일일 리 없지.



"강의 가야 하는데."



"오늘 같은 날 집중이 되겠어?"



슬슬 일어날 생각으로 말하자 오히려 되묻는다.



"집중이 안 돼도 어떻게 할 거야, 강의는 들어야지."



전공은 아니지만, 출석 점수는 꽤 중요하니까.



"어차피 시험 잘 볼 거면서."



"그건 그거고."



"그러지 말고, 오늘은 자체 공강 어때? 더 놀게."



더 놀자는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대학생에겐 '자체 공강'이 그냥 공강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법. 


그리고 나는 강의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렸다. 뭘 해도 정말 즐거웠으니까. 어쩜 그렇게 잘 맞춰주는지. 불편한 건 하나도 없이,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나중에 안 거지만, 그날 전까지는 관찰 기간이었고, 어느 정도 관찰이 끝나 첫 단계를 시도해본 거라고 하더라. 사귈 때 들었던 이야기라서 아니, 굳이 대시(당시에는 플러팅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지 않았다)를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물었었다.



"예민하고, 속 이야기 꺼내는 거 싫어하고, 나한테 이성적인 관심 1도 없어 보이고. 그런데 막무가내로 들이밀면? 네가 나를 만나줬을 것 같아?"



그렇게 돌아온 대답에 어이가 없기도, 감탄이 나오기도, 미안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그 사람의 계획대로 시간을 충분히 쓰며 우리 둘은 친해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친밀했다. 다만 내 완고한 벽 때문에 깊은(속 이야기까지 하는) 사이가 되기엔 멀다고 느껴졌을 뿐. 심지어 이성으로는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당시 그 사람이 참 대단했다고 새삼 느꼈다. 


가능성을 보았던 걸까? 자신이 있었던 걸까?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봤지만, 그 사람을 잘 알게 된 후에는 알 수 있었다. 원하는 것에 솔직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들이붓는 사람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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