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지만, 제대로 말 섞는 건 처음인데요
쓰레기 같았던 연상 그놈 이후, 나는 내가 연애를 당분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몇몇 호감 표시를 완고하게 거절하기도 했었으니까.
아직 대학 생활이 남아있던 시점이라서 휴학을 종료하고 복학했다. 공부에나 집중하면 딱 좋을 시기라고 여겼다. 실제로 힘든 전공 강의가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했고.
그러다 교양으로 듣게 된 CPR 자격 이수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맙소사,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그냥 무시하고 가버리기엔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낯이 익은데 누군지 잘 모르겠는 남자.
시선이 절묘하게 맞닿아서 피하기도 애매했던 그 몇 초.
기억났다.
동기들과 유독 거리를 두던 동기.
그래서 거의 모든 동기들과 두루 잘 지낸 나조차 몇 마디 섞어본 적 없는.
기억이 나니 다음은 쉬웠다.
"안녕?"
가볍게 인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상대는 나를 무조건 알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조금 창피하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 동기 중에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자퇴생 빼면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유학 뒤늦은 나이에 입학한 대학, 노는 거 좋아하는 성격.
모를 리가 있나?
그 남자 동기 역시 꾸벅 인사를 해온다. 나이가 좀 많다고 해서 동기들에게 누나 대접을 바란 적은 별로 없었고, 실제로 두루 편하게 지냈었기 때문에 그 인사가 조금 서먹하게 느껴졌다.
"우산 없으세요?"
하지만 그렇게 물어봐주니 어색함이 조금 덜어졌다.
"응, 없어. 망했어."
망했다고 말하면서도 상황이 웃겨 웃으니 잠시 나를 쳐다보던 남자 동기가 우산을 씌워줬다.
제법 큰 검은색 우산,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언뜻 어두운 느낌인데도 이상하게 그 상황이 반가웠다.
나를 알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이라서 더 그랬을 거다.
적어도 그때는 '새로운 친구'의 가능성만을 생각했을 때니까.
그래도 동기에 3학년인데 말을 제대로 섞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에
"그래도 동기인데 좀 심했다, 그렇지?"
그렇게 물으니 또 가만히 쳐다본다.
"그래요? 저한텐 누나 첫인상이 워낙 강렬했어서."
음? 첫인상이랄 게 있었나?
막 입학했을 때의 나는 햇빛이 비추면 작열하는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이었으니 그게 강렬했을 수는 있겠다. 뭐, 햇빛 없는 그냥 붉은빛 정도였지만. 그런데 염색 더 세게 한 애들도 많았는데.
"대면식 때, 1700cc에 소주 들이 부으시던데."
그제야 생각났다.
동기사랑 어쩌고 하는 명목으로 선배(지만 나보다 어렸다)들이 맥주통 1700cc에 소주를 가득 부어 돌리라고 했었던 거. 당시 내 테이블에 있던 동기들이 술을 잘 못했던 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을 마셨던 거. 오래간만에 머리가 빙글 돌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날.
그 꼴을 봤다면, 음, 강렬했을 수 있겠다.
"미친년인 줄 알았겠다. 빨간 머리에 소주를 그렇게 들이켜대는 걸 봤으면."
"보통 미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웃어버렸다.
조용한 줄 알았는데, 그건 완전히 착각이었다. 칭찬도 아닌데 왜 웃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것조차, 그저 즐거웠다.
내가 그 짧은 재회 아닌 재회를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남자 동기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못 배울 수도 있었던 걸 전부 그 동기에게 배웠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됐고, 그때보다 나아질 수 있었고, 그간 안고 있던 상처를 대부분 치료할 수 있었다.
여전히 가끔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로,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지만, 그 동기는 내게 있어 평생의 은인일 거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좋은 남자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첫사랑과는 다른 의미로 평생, 잊지 못하겠지.